Point 1 삶의 진실을 성찰하라
Point 2 보리심을 개발하라
Point 3 역경을 깨달음의 길로 바꾸어라
Point 4 평생 수행을 유지하라
Point 5 마음수련이 잘 되고 있는지 평가하라
19. 모든 다르마의 목적, 이기심을 버려라.
20. 타인과 나, 두 심판자 중 자신에게 의지하라.
21. 항상 즐거운 마음을 유지하라.
22. 마음이 어수선할 때도 수행하라.
5장을 마치며
Point 5 마음수련이 잘 되고 있는지 평가하라
수행의 발전 정도를 가늠하는 네 가지 방법
이따금 자신이 마음수련에서 얼마나 발전했는지 평가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다섯 번째 수련법에 포함된 네 경구는 우리의 마음이 보다 타인 중심적이 되었는지 아니면 세계를 인식하는 더 미세한 습성에 빠져 있는지 입증해서 수행의 발전 정도를 측정하는 것이다. 이 로종 수련법에는 균형감이 필요하다. 자신이 수행에서 얼마나 향상되었는지 강박적 관심을 갖는 것은 또 하나의 집착이며, 반대로 수행의 진척에 전혀 관심이 없어도 해롭기 때문이다.
이 경구들을 기억하고 있으면 그 말들이 수행을 자율적으로 규제하는 역할을 한다. 이 경구들은 날카롭고, 간결하고, 때로는 수수께끼 같다. 그런데 반복해서 성찰할수록 보다 깊은 의미를 드러낸다. 이 경구 들은 로종 수행에서 자신을 남과 바꾸는 능력을 평가하는 네 가지
방법이라고 한다.
19. 모든 다르마의 목적, 이기심을 버려라
다르마dharma (티베트어 최chos)는 글자 그대로 '가르침'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불교의 가르침과 동의어가 되었다. 불교의 가르침이 '알 수 있는 것'을 다루기 때문이다. 다르마의 온전한 티베트어 표현은 셰쟈 최 shes bya chos인데, 셰 쟈shes bya는 '알 수 있는'이라는 뜻이고 최chos는 '현상'을 의미한다. 불경은 물리와 정신 현상의 맥락 및 혼란한 존재 상태와 깨달은 존재 상태의 맥락에서 알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그 까닭은 부처님 가르침의 구원론적 요지가 오직 알 수 있는 것을 이해함으로써 존재의 핵심적인 면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지와 지혜는 무엇인가?" "혼란한 윤회 상태에 있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 "윤회로부터 해탈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런 질문은 알 수 있는 현상을 조사하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의존적 존재 상태(윤회)에 대한 지식은 오직 알 수 있는 것에 대한 통찰로부터 얻을 수 있다.
다르마는 그 가르침이 담긴 경전만 따져도 양이 매우 방대하다. 성경이나 코란 혹은 구약 성서처럼 책 한 권에 담을 수 없다. 불교의 가르침은 이토록 다양하고 방대해서 그 안의 여러 갈래의 흐름들이 마치 서로 다른 목표를 지향하고 다른 목적을 가진 것처럼 보이기 쉽다. 하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목적과 의도가 같다. 또 같은 속박으로부터 같은 해방으로 이끈다.
불교 가르침의 모든 목표는 무지를 극복하는 것이다. 망상이 눈을 가리므로 우리는 경험에서 거짓된 결론을 이끌어 낸다. 이는 헤아릴 수 없이 큰 괴로움을 초래한다. 망상의 마음 상태에서 가장 주된 요소는 이기적 집착이다. 이기적 관점을 따르는 경험에 집착할수록 망상의 마음 상태는 다루기 어려워진다. 기분이 우울할수록 남에게 온갖 투사를 하고 아무도 자신에게 신경 쓰지 않는다고 믿는다. 자기 집착은 부정적 감정을 부채질하고 내면의 불안에 사로잡히게 해서 결국 아무것도 명확히 볼 수 없게 만든다. 다르마락시티는 이렇게 설명한다.
- 에고가 그대의 적이기 때문에 맞서 싸우겠는가? 에고 자체가 보호자이기 때문에 그걸 보호하겠는가? 바로 에고가 그대가 한 일과 방치한 일 모두의 목격자이다. 에고를 길들이면 그대는 해방될 것이다.
모든 불교학파는 '자립적인 개별적 자아가 있고 변함없는 실체적 타자가 있다'는 확신에서 무지가 생긴다는 데 동의한다. 우리에게 어떤 정신적 실체가 있다는 생각에서 자아가 있다는 확신이 생긴다. 또 사물에 고유의 존재가 있다는 생각에서 현상이 있다는 확신이 생긴다. 예외 없이 모든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런 잘못된 신념 탓에 우리는 왜곡되고 꿈과 같은 세상에서 정처 없이 헤맨다. 그러므로 이 경구의 유일한 목적은 명상 수행으로 망상을 줄이고 무아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불교명상은 단지 어떤 정신 상태를 조성하는 심리학적 작용이 아니라 에고에 대한 집착을 초월하는 길이다. 고닥빠는 에고를 초월하는 것을 이렇게 노래한다.
- 병과 괴로움의 어둠 속에서 해탈에 이르는 길을 잃었다. 하지만 태양의 안내를 받아 장애를 제거하여 이기심이 사라졌고 후회는 없다.
불교문헌에서는 전통적으로 무아의 개념을 마차에 비유해 설명한다. 마차는 목판, 차축, 바큇살, 바퀴의 금속 테두리, 고삐, 좌석 등으로 구성돼 있다. 이런 부품을 전부 조립하면 마차가 된다. 반대로 모든 부품이 각각 흩어져 있으면 마차가 아니다. 그러므로 각각의 부품이 본래부터 마차로 존재한다고 볼 수 없다. 부품 전체도 본래 마차로 존재한다고 볼 수 없음이 증명된다. 찬드라키르티는 이 주장을 이렇게 요약한다.
- 만일 마차가 단지 부품이 모인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흩어져 있는 부품도 마차가 될 것이다. 하지만 부품의 주인이 없으면 '부품'도 없으며, 또한 그 형상 즉 단순한 형태도 마차가 될 수 없다.
초기불교 교리는 마차의 비유를 들어 인간을 이루는 다섯 가지 ‘정신-물리적 구성 요소(오온五蘊)'를 열거했다. 그것은 물리적 형상(색色), 느낌(수受), 정신적 성향(행行), 인지(상想), 의식(식識)이다. 그것들이 합쳐질 때 자아의 개념이 생긴다. 마차가 단지 모든 부품이 특정한 구조로 조립되었을 때 '마차'라는 실체가 되는 것처럼 구성요소들에 의존하지 않는 자아는 없다. 이렇게 분석을 통해 자립적이고 개별적이고 변하지 않는 자아 같은 건 없다는 사실을 점차 이해하게 된다. 사실 자아라는 실체가 있다는 믿음이 바로 무지의 원천이다. 브리스틀 대학의 루퍼트 게신 Rupert Gethin은 『불교의 토대 The Foundations of Buddhism 』에서 이렇게 밝힌다.
- 물리적 사건과 정신적 사건은 무작위적으로 되는 대로 발생하지 않으며, 사건과 현상 사이에는 깊고 실질적인 인과적 연관성이 있다. 그리고 불교철학의 핵심에 있는 것은 인과적 연관성의 본질에 대한 관심이며, 그것이 모든 불교 수행의 효과를 입증한다고 생각된다.
대승불교 문헌에서는 개인의 무아가 확장되어 현상의 무아까지 망라한다. 의존적 발생(연기)을 이해함으로써 무아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의존적 발생에서는 자아와 타자가 서로를 정의하고 상호 의존하므로 오직 '타자'의 개념이 있을 때만 자아의 개념을 형성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기 아닌 다른 어느 것과도 연관되지 않은 개별적이고 자주적인 실체는 결코 옹호할 수 없으며, 외부 현상이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의 상태를 지향한다는 주장이 틀렸음을 입증한다. 현상의 무아는 공空과 맞닿아 있다. 그리고 대승불교의 가르침에서 공에 대한 통찰은 무지의 궁극적 해독제이다. 빼뛸 린뽀체는 까담파 전통에 나오는 다음 이야기로 그 점을 설명한다.
- 돔뙨빠가 아티샤에게 궁극적 가르침이 무엇인지 물었다. 스승은 이렇게 대답했다. “모든 가르침 중 궁극의 가르침은 공이며, 공의 핵심은 자비이다. 실재의 본질인 공의 진리에 대한 깨달음은 세상의 모든 병을 고칠 수 있는 만병통치약과 같다. 그것은 온갖 번뇌의 치료제이다.
모든 불교 가르침은 목적이 같다. 즉 현상의 존재에는 자립적이고 영원하며 실체가 있는 '자아'도 '타자'도 없음을 깨달아 무지를 없애는 것이다. 이렇게 허술한 허위를 신념으로 삼으면 괴로움의 상태에 갇힌다. 주체와 객체, 현상과 실재, 망상 의식과 지혜 의식의 불이성을 이해할 때 우리의 실제 상태에 대해 올바른 통찰을 얻기 시작한다. 해탈에 이르게 하는 그 통찰이 바로 모든 불교 가르침의 목적이다. 이 경구는 이기적 집착을 철저히 포기할 수 있는지 가늠해서 마음수련이 잘 되고 있는지 평가하는 걸 돕는다. 꾄촉 갤첸Konchok Gyaltsen은 이 점을 매우 분명히 말한다.
- 그러므로 모든 수행, 특히 마음수련 수행으로 자기 집착을 버리지 못하면 그대 안에서 마음수련의 깨달음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가슴속에서 마음수련에 의한 깨달음이 일어났는지는 그것이 자기 집착을 고치는 해독제가 되었는가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20. 타인과 나, 두 심판자 중 자신에게 의지하라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는 인생을 살 수 없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밝히는 두 가지 의견이 있다. 하나는 스스로 자신을 보는 의견이고, 다른 하나는 남이 우리를 보는 의견이다. 우리가 수행에서 발전하고 있는지 궁금할 때 대개 남들에게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알아볼 수 있는지 묻는다. 그런데 우리에 대한 남의 의견은 자신의 의견과 같지 않을 때가 많다. 그 까닭은 다른 사람이 우리의 내면을 제대로 보지 못하거나 가혹하게 판단하기 때문일 수 있다. 이와 반대로 남이 이해와 용서의 눈길로 우리를 보는 데 비해 우리가 자신을 지나치게 비판적으로 보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남보다 우리가 자신을 더 너그럽게 본다.
남이 우리를 보는 의견을 완전히 무시하면 안 되겠지만 자신보다 남의 의견을 더 신뢰해도 안 된다. 이것은 매우 복잡한 문제로 미묘한 요인에 많이 의존하기 때문이다. 나가르주나는 어떤 사람이 정말 참된 사람인지 아닌지 아는 것은 망고 열매 속을 아는 것만큼이나 어렵다고 말했다. 어떤 사람을 대단히 좋은 사람으로 생각했는데 나중에 비열한 사람인 걸 알게 되는 일이 있다. 반대로 처음에는 무뚝뚝하고 본데없는 사람인 줄 알았지만 매우 친절한 사람으로 밝혀지기도 한다. 그래서 나가르주나는 이렇게 말한다.
- 사람은 망고 열매 같다는 걸 잊지 마라. 덜 익었지만 익은 것처럼 보이고 잘 익었는데 덜 익어 보일 수 있다. 덜 익어 보이는 대로 실제 덜 익은 것도 있고 익은 그대로 익은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남이 우리를 보는 의견도 중요하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오직 우리 자신이 스스로를 제대로 판단할 수 있으므로 우리가 자신을 보는 의견에 의지해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해석한 논서들의 권고에 따라 자신에 대해서는 부끄러움을 지니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예의를 지켜야 한다. 그렇다고 로종 수행이 '개인주의'를 옹호하는 건 아니다. 남의 의견이 전혀 타당하지 못하다고 거부하고 자신의 일은 자기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생각을 부추기는 게 아니다. 요즘은 그런 태도가 매우 흔하다. 하지만 그런 체하는 사람도 남의 의견이 자신에게 적합할 때는 그것이 중요한 것처럼 행동한다. 누군가와 연애하기를 원하거나 법을 위반해 체포되어 법정에서 증언을 들어야 할 때는 온갖 사회적 기대와 예절에 기꺼이 순응하려 한다. 로종 수행에서는 그런 위선을 조장하지 말고 자신에 대해 자기 의견보다 남의 의견을 더 중시하지 말라고 권한다. 빼뛸 린뽀체는 보다 넓은 범위에서 이를 경고한다.
- 그대는 윤회에 약간의 환멸을 느낄지도 모르고, 윤회에서 벗어나고자 어렴풋이 결심할 수도 있으며, 신실한 불제자인 척해서 보통 사람들이 깊은 감동을 받아 그대의 후원자나 제자가 되고 싶어 하도록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때 자신을 매우 엄격하게 보지 않으면 남들의 생각이 사실인 줄 알기 쉽다. 자만심으로 우쭐해서 겉모습에 몹시 도취되고 원하는 건 뭐든 할 수 있다고 믿기 시작한다.
자기 평가에는 두 부분이 있다. 첫째는 망상, 한계, 자기기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정말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이다. 이는 자신을 판단해서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결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부정적 습관을 극복하는 법을 평가하려는 것이고 부정적 생각과 태도를 품는 경향을 다루려는 것이다. 부정적 습관과 성향이 있다고 나쁜 사람인 건 아니다. 자기 평가의 둘째 부분은 망상, 한계, 자기기만이 있는 자신의 실제 성격과 됨됨이를 알 수 있는 방법과 관련된다. 스스로 속이는 게 아니라 정말 좋은 사람이 되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첫째 연습은 우리가 정말 어떤 사람인지 참되고 진심 어린 자기 평가를 하는 것이다. 남에게 보이는 피상적이고 사회적인 수준에서 자신을 보는 것보다 더 깊은 수준에서 자신을 보는 것이다. 사회적 수준의 알아차림도 일종의 자기 평가이지만, 이 경구는 자신의 실제 동기와 의 견을 정직하게 평가할 수 있는 더 깊은 수준의 자기 분석으로 자신을 보는 것에 관련된다. 샨티데바는 이렇게 충고한다.
- 모든 면에서 자신의 마음을 잘 살펴서 해로운 생각이나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 보살도를 걷는 영웅은 대응책으로 확고히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보통 인간인 우리는 항상 한계가 있으며 오직 부처가 된 사람만 자신을 온전히 알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 확실히 알고자 진실로 노력하면 틀림없이 다른 사람의 의견보다 더 정확하게 자신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미처 모르는 자신의 장단점을 다른 사람이 알 수도 있다. 또 우리가 자신을 잘못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오직 우리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판단할 수 있다. 자기기만은 매우 강한 성향이므로 자신이 실제보다 낫거나 나쁘다고 스스로 속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성향이 있어도 꾸준히 명상 수행을 하면 자 신을 정직하게 평가할 수 있다. 이것은 쉬운 과정이 아니다. 오랫동안 자기 자신을 도무지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기기만은 정말 다루기 힘든 문제가 아니다. 자기기만이 주는 환상이 불필요하다는 걸 인식하면 자기기만을 비교적 수월하게 극복할 수 있다. 이미 드러냄의 힘에 익숙하다면 자신을 정직하게 평가하는 데 능숙할 것이다. 세 칠부 최끼 갤첸se Chilbu Chokyi Gyaltsen은 그것을 이렇게 말한다.
- 그렇다면 무엇이 주요한 목격자인가? 그것은 반대할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간주하라. 그대가 오늘 저녁 죽는다 해도 더 많은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연습은 자신이 발전한 것을 어떻게 아는지 평가하는 것이다. 어떤 이가 우리를 칭찬할 때 오직 자신만이 그 평가가 사실인지 아닌지 알 것이다. 단지 다른 사람이 우리가 변했다고 생각한다고 정말 자신이 변했다고 여기면 안 된다. 우리가 실제로 변화되었는지 알려면 스스로를 깊이 살펴보아야 한다. 로종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가 정말 변화되었는지 알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은 우리 자신과 남을 보는 관점에 근본적 변화가 있는지 보는 것이다. 만약 우리의 이기적 관점이 남을 존중하는 관점으로 바뀌는 참변화가 일어났다면 로종 수행이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이와 달리 단순히 개인적인 변화나 아무 의미 없는 일상생활이 바뀌는데 지나지 않으면 마음수련의 진전이 없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고 오히려 남의 의견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남을 기쁘게 하거나 남의 의견에 순응하려 하면 길을 잃을 것이다. 판촉 갤첸은 이렇게 말한다.
- 다른 사람은 단지 그대의 긍정적 행동이나 기분 좋은 말 때문에 혹은 우연히 그들의 기대에 부응했기 때문에 그대를 좋은 수행자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두 목격자 중 주요한 목격자는 그대의 마음이 자신을 비난하지 않는다는 확신이다.
인간은 결코 멈춰 있지 않으려 한다. 윤회에 갇혀 있다고 느끼면서도 늘 어딘가로 움직인다. 우리는 끊임없이 변하고 좋든 나쁘든 새로운 자질과 습관을 개발하므로 남을 대하는 면에서 자신에게 참된 정신적 변화가 일어나는 표시를 찾을 필요가 있다. 참된 변화의 표시가 없으면 스스로 속인다는 의혹을 떨칠 수 없다. 우리는 평범한 의식 있는 존재여서 이기적 생각과 욕구를 완전히 버리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람됨을 정직하게 평가하고 점차 이기적 성향을 줄여 나가는 것이 관건이다. 우리가 자신과 남에게 가슴을 열고 관대하며 자비롭다면, 또 스스로와 남을 사랑한다고 평가할 수 있으면 마음수련을 한 효과가 있는지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없다.
출처: 티베트 마음수련법 로종 / 따렉 깝관 지음/ 켄 윌버 추천, 이창엽 옮김 / 담앤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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