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int 1 삶의 진실을 성찰하라
Point 2 보리심을 개발하라
Point 3 역경을 깨달음의 길로 바꾸어라
상대적 보리심의 방편
절대적 보리심의 방편
특별한 방편
15. 최고의 전략인 네 가지 수행을 하라
특별한 방편
대개 우리는 역경을 방해로 여기고 가능하면 피하려 한다. 하지만 삶의 상황을 오해하고 실제로는 전혀 해롭지 않은 것을 위험하다고 인식하는 일이 많다. 반면 실제로 매우 파괴적인 것을 이롭다고 오해하는 일도 있다. 오락을 할 때 느끼는 즐거움에서 많은 기쁨을 얻을 수 있다. 또 행실이 나쁜 사람의 수상쩍은 행동에 마음이 끌리거나 사업상의 기회, 뜻밖의 경제적인 소득, 그 밖에 매혹적인 여러 일이 실은 인생에 큰 피해를 줄 위험이 있는데도 이를 좋은 것으로 여길지 모른다. 그래서 빼마 까르뽀는 이렇게 말한다.
- 그대는 멋있는 인생을 원하지만 늘 엉뚱한 일만 한다. 그리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자 괴로움의 원인을 찾아다닌다. 그래서 자신의 충동에 얽매인 노예가 되었다.
또 우리는 주변 환경과 다른 사람에게 여러 번 속았다. 빛나는 갑옷을 입은 기사나 인간의 모습을 한 여신을 만났다고 기뻐할지 모르지만 사실 기사가 아니라 사기꾼이고 여신이 아닌 마녀인 걸로 밝혀진다. 그런 산만함으로 인해 최면 상태에 빠지고 어리석게 행동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큰 고통과 비참함을 겪고 후회, 자기 폄하, 자기혐오, 절망에 찌든다. 대상을 제대로 지각하지 못하면 역경이 닥칠 때 고통과 괴로움을 겪게 된다. 그러므로 특별한 방편을 이용해 일상생활에서 생기는 곤경을 다룰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특별한 방편이란 매일 우리의 행동을 개선하는 방법이다. 이어서 소개하는 두 경구가 이와 관련이 있다.
15. 최고의 전략인 네 가지 수행을 하라
여기서 역경을 '나쁜 조건'이라고 하는데, 그 상황을 단지 일시적인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우리를 계속 힘들게 하는 것은 상황 자체가 아니다. 우리가 괴로움에 집착하기에 일어나는 감정의 혼란이다. 그러므로 바로 그런 집착을 잘 다루어야 한다. 그저 나쁜 조건은 항상 원 치 않는 경험과 상황을 일으키므로 인생에는 고통스러운 상황이 끊임없이 생긴다. 하지만 그 순간 우리의 마음이 거기서 벗어날 수 있다면 고통스러운 상황이 반드시 우리 마음속에 번뇌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로종 수행은 이렇게 역경을 잘못 이해하여 불행에 고착될 때 일어나는 괴로움을 다루는 불교수행법을 제공한다. 그것은 네 가지로 공덕 쌓기, 참회하기, 악령에게 공양물 바치기, 다르마의 수호자들에게 공양물 바치기이다.
1. 공덕 쌓기
불교에서 강조하는 공덕의 개념은 서양인이 이해하기 매우 까다로운 것이 분명하다. 서양인은 대개 공덕을 일종의 회계 제도나 예금 잔고로 생각해서 공덕을 쌓거나 꺼내 쓰면 흑자나 적자가 된다고 여긴다. 하지만 공덕을 쌓는건 그런 게 아니다. 에너지를 변환할 수 있는 어떤 것처럼 소유하거나 잃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공덕의 개념은 심리적·정신적 기질의 특성을 말한다. 삶이 풍요롭기를 원하고 모든 게 부질없다는 공허함을 극복하고자 한다면 공덕을 기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아야 한다. 공덕을 쌓는 것에 따라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는지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는 단지 성격 특성을 형성하는 심리적 기질만 말하는 게 아니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정신적 능력도 가리킨다. 이런 용어를 번역하기 어려운 이유는 유신론적 언어를 사용해 불교의 개념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서양의 세속적 사상에 맞춰 불교용어를 설명하면 정신적 요소를 놓칠 수밖에 없다. '공덕' 같은 불교개념에는 매우 강한 정신적 차원이 있기 때문에 그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공덕의 전체 개념은 대략 다음과 같이 작용한다. 큰 공덕을 쌓으면 장애를 피하며 역경을 예방할 수 있다. 충분한 공덕을 쌓으면 역경을 극복할 수 있다. 공덕이 거의 없으면 실제로 삶에 역경을 끌어들인다. 허약한 몸이 병을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처럼 공덕은 부유함, 행운, 긍정적 성격과 기질 등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모든 행복의 원인이다.
그런데 그런 행복은 결코 '우연히' 얻는 게 아니다. 행운이나 결심, 몇 번의 인정 많은 행동 덕분에 생기는 것도 아니다. 전생에서 공덕을 쌓은 덕분에 얻은 것이다. 빼마 까르뽀는 "인간의 몸은 우연이 아니라 공덕을 쌓아서 얻은 것이다"라고 말한다. 공덕을 쌓으려면 자비로운 행위를 하고 친절한 마음으로 선한 의식 상태를 개발해야 한다. 그러면 삶이 부정적인 현상에 영향을 받지 않고 긍정적 에너지가 흐르게 된다. 반면 늘 부정적 관점으로 사물을 보면 설령 좋은 일이 생겨도 금방 공덕을 소진해 버리고 온갖 격변과 혼란에 노출돼 삶에 부정적인 에너지를 끌어오게 된다.
티베트불교에서는 두 갈래 접근법(티베트어로 '최진mchod sbyin')을 받아들이라고 가르친다. 여기서 최chod는 '공양물', 진sbyin은 '주기'를 의미한다. 티베트 불자들은 존귀한 존재에게 예식을 올리고 중생을 위해 헌신한다. 부처들과 보살들 같은 존귀한 존재에게 제사를 드리고, 선원에 기부하고, 탱화나 유물함·불상·경전 등을 봉헌한다. 또 몸과 말과 마음을 게으르지 않게 함으로써 평범한 중생에게 봉사한다. 위대한 존재를 받드는 데만 헌신하고 우리 자신과 같은 평범한 중생을 무시하면 안 된다. 깨달은 존재에게나 망상에 사로잡힌 중생에게나 똑같이 친절과 강인함과 열성의 행동으로 예를 올려야 한다. 그래서 아리야데바는 이렇게 말한다.
- 여래가 말씀하시기를 오랜 세월 동안 방편을 통해 끊임없이 모인 공덕은 한없이 커서 전지全知한 분조차 헤아릴 수 없다.
2. 참회하기
불교에서 참회는 독특한 의미가 있다. 라마승이나 스승 등 누군가에게 고백하는게 아니라 부끄럽게 여기는 것과 마음속 깊은 곳을 갉아먹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참회의 개념을 이해하려면 업業의 작용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과거 행동의 동기가 공격성, 분노, 이기주의, 질투, 원한으로 오염돼 있었다면 악덕이 발생한다. 공격성에서 비롯된 행동을 하거나 악의를 갖고 남을 헐뜯거나 남이 곤경에 처한 것을 기뻐할 때, 깊은 흔적이 생겨 마음속에 숨겨지고 잠재적인 업이 된다. 알아차림을 하며 신중히 행동하지 않으면 이런 부정적 업의 흔적이 의식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점점 쌓이고 곪는다. 그리고 적당한 조건이 주어질 때 촉발되어 나쁜 경험의 형태로 나타난다.
다행히 업의 인과관계는 기계적으로 미리 정해진 대로 작동하는 것 이 아니라 매우 가변적이다. 즉 업의 결과로 반드시 고통을 당해야 하는 건 아니다. 불교에는 어떤 종류의 도덕률도 없다. '업의 법칙'이란 불교적 사고에 도입된 서양의 개념이다. 원인과 결과의 관계는 대단히 복잡하고 불확실해서 정해진 '법칙'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업의 인과관계가 있지만 원인과 결과는 모두 인간의 행위에 관한 것이므로 모든 경우에 적용되는 보편 법칙 같은 것은 없다.
지난 세기에 서양의 사상가들은 정치와 도덕 철학에서 자연법칙과 도덕법칙을 말해 왔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그런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 것 같다. 심지어 물리학조차 자연법칙을 말하는 경우가 점점 적어지고 있다. 힌두교에서는 보편적 우주 질서에 대한 믿음을 고취하는데 그것은 업의 개념에 집약되어 있다. 그런데 우주가 정말 법칙에 따라 질서정연하다면 우주에 순응하기만 하면 혼란과 예상치 못한 사건이 발생하는 걸 막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업을 참회하면 업을 바꾸거나 개선할 수 있다. 자신의 부정적 행위를 인정하고 화산 폭발처럼 격렬할 수 있는 업의 활동을 겉으로 드러냄으로써 나중에 훨씬 더 큰 폭발이 일어나는 걸 방지할 수 있다. 부정적 행위가 발생시킨 잠재적 업의 성향을 벗어나려면 진정으로 뉘우치고 참회해야 한다. 의식적으로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끔찍한 일을 저지르면 언제나 그것에 대한 죄의식으로 끊임없이 괴롭다. 그리스도인이 말하듯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이다. 그 불쾌한 경험은 미래에 매우 부정적인 경험을 일으킬 잠재력이 있다. 이처럼 죄의식은 과거에 고착되어 있고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게 한다.
반면에 진정한 뉘우침은 앞으로 다시는 그런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포함하기 때문에 매우 효과적인 예방책이다. 그런 의미에서 빼뛸 린뽀체는 이렇게 말한다.
- 뉘우침의 힘은 과거에 저지른 부정적 행위에 대한 깊은 후회에서 비롯된다.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자신의 악행이 잘못임을 알고, 통렬히 후회하며 참회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정화될 수 없다.
후회를 인정하는 과정에 증인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다. 이를 위해 부처들과 보살들이 자신의 곁에 있다고 상상하며 그분들에게 다음과 같이 참회하고 기원한다.
"제가 이런저런 행위를 했으며 저의 잘못된 행위를 온전히 인정합니다. 저의 행위로부터 숨지 않고 제가 한 일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습니다.”
원하는사람은 참회문을 낭송하기도 한다. 그 후에 부처들과 보살들이 우리의 참회를 받아들이고 업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게 해 준다고 상상한다.
3. 악령에게 공양물 바치기
티베트불교에서는 두 가지 해로운 존재 혹은 힘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하나는 삶에서 혼란을 초래하는 존재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빚을 진 존재이다. 이를테면 매우 중요한 사람을 만나러 가는데 출발 전에는 아주 건강했지만 도중에 병에 걸렸다면 부정적인 힘이 개입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또 남에게 '미결의 빚'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과거에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서, 특히 환생을 믿는다면 우연이든 고의든 다른 사람들에게 빚을 졌을 가능성이 많다.
환생이나 악령과 유령을 믿는 것이 로종 수행에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실제로 존재할 가능성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그것은 너무 주제넘은 태도다. 여러 재난이 잇달아 일어날 때, 유령과 악령이 우리를 해치려 하거나 삶에 혼란을 부추기려 한다고 염려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굳게 믿는다. 이와 관련해 불교는 모든 사람에게 제공할 것이 있으므로 이런 간섭을 해결할 방법도 있다. 종교의식을 거행하는 것은 우리가 끌어들였는지 모르는 부정적 힘을 달래는 것이다. 인간 아닌 존재들에게 빚을 졌기 때문에 그들이 해치려 할지도 모른다고 여기면 그들에게 '공양떡'을 바칠 수 있다. 다르마락시타 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현상을 어떻게 보느냐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 적이나 악마가 생길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전혀 고려하지 마라. 자아에 대한 집착과 남에 대한 혐오를 짓밟아 버려라. 절대 그것을 상상하지 말고, 기억과 인식을 분노한 대위덕명왕大威德明王(Yamantaka)처럼 바라보라.
실제로 악령이 존재하지 않아도 그 존재를 정말 믿는 듯이 종교 의식을 거행하면 약간의 심리적 안도감을 얻을 것이다. 때때로 사람들은 의기소침하고 민감하고 불안할 때 어떤 고약한 다른 세상의 존재가 주위를 떠돈다고 짐작한다. 유명한 티베트 수행자 밀라레빠는 우리가 깜짝 놀랄 때 실제든 상상이든 악령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어느 날 밀라레빠가 외출했다가 돌아오니 그가 사는 동굴에 수많은 정령이 모여 있었다. 처음에 그는 놀라서 정령들을 복종시키려 애쓰고 그들에게 동굴을 떠나라고 요구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밀라레빠가 보리심을 불러일으켜 자비심을 전하자 정령들이 사라졌다. '붉은 바위 마노 산Red Rock Agate Mountain'이라는 노래에서 밀라레빠(밀교의 5대 부처 가운데 한 분이며 보살이나 명왕으로 모습을 바꾸어 나타나 악마를 굴복시킨다)는 이렇게 노래한다.
- 악령이여, 여기 더 머물고 싶다면 나는 괜찮다. 동료들이 있다면 데리고 오라 우리의 다른 점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아아! 나는 이 정령에게 연민을 느낀다.
어원학적으로 공양떡을 뜻하는 티베트어 '또르마rorma'는 '때려 부수고 멸절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런 공양물과 종교의식은 유익하지 못한 감정, 업보, 기질, 불길한 환경과 여건에서 비롯된 부정적 힘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것이다. 공양떡을 잘 만들 필요는 없다. 일종의 보상으로 무엇이든 바쳐도 되고 실물 대신 상상으로만 바쳐도 된다. 낭송하는 간단한 전례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식이 아니라 "이리 와서 떡을 좀 드시고 이제 나를 괴롭히지 마세요"라고 말하는 심리적 과정이다. 악령과 전쟁을 하거나 악마 같은 것을 몰아내려는 게 아니다. 미신에 너무 빠져 어디서나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한다고 믿으면 안 된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무엇이 존재하고 무엇이 존재하지 않는지 알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이 수행에서 중요한 점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도 열린 태도를 갖는 것이다. 다음과 같이 기도하면서 효과가 있다고 상상하면 또르마를 바치는 행위가 우리의 부정적 경향을 바꿀 것이다.
"살았든 죽었든 모든 중생에게 빚진 것을 지금 최종적으로 갚기를 원합니다. 의도적으로 교활한 행위였든 부주의나 게으름 때문이었든 내가 빚을 진 것을 모두 갚겠습니다. 나는 여러분과 다툴 일이 없고, 악의 도 없고, 원한도 없고,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4. 다르마의 수호자들에게 공양물 바치기
다르마의 수호자들은 자비롭고 깨달은 존재이다. 마치 그리스도 교의 천사처럼 해로운 환경과 여건에서 우리를 보호해 준다. 나쁜 일이 일어나거나 재난을 예방하고자 도움을 요청할 때, 그들에게 보호해 달라고 기원하며 또르마(공양떡)를 바친다. 병들거나 파산하거나 비극이 닥쳐 너무 힘들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이렇게 역경에 처해 아무것도 소용없을 때 다르마 보호자들에게 공양물을 바치는 지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대안 전략이다. 악령과 다르마 보호자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여럿 있고 티베트불교에도 있다. 위대한 은둔 수행자 고닥빠Godrakpa(1170~1249)는 이렇게 말한다.
- 깨달음이 없을 때 혼란된 현상과 악령의 방해가 출현한 것이 신과 유령이다.
티베트에 널리 알려진 쬐Chod 수행(티베트어 '쬐'는 '끊는다'는 의미로 번뇌와 업, 아상을 소멸하고 완전한 자비를 구현하는 지혜를 얻기 위한 수행이다)을 창안한 이는 여성 스승인 마칙 랍된Machik Lapdron (1055~1149)이다. 그는 쬐 가르침에서 악령이란 어떤 면에서 우리의 심리 상태라고 할 수 있고, 다른 면에서는 외부의 존재로 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녀는 『완벽한 설명 Complete Explanation』에서 이렇게 말한다.
- 악귀라는 것은 마주치는 사람들을 겁주고 망연자실하게 만드는 거대한 검은 괴물이 아니다. 자유를 얻는 걸 방해하는 모든 것이 곧 악귀이다. 그러므로 매우 가깝고 사랑스러운 친구도 우리의 자유를 방해한다면 악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자아에 대한 집착이 가장 큰 악귀이다. 우리가 자기 집착을 끊어 버릴 때까지 모든 악귀들은 입을 크게 벌리고 기다리고 있다. 따라서 자기 집착이라는 악귀를 끊어 버리기 위해 방편을 이용해 노력해야 한다.
다르마의 보호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그들을 우리의 지혜의식의 반영으로 간주할 수 있다. 외부에 있는 다르마의 보호자를 달래거나 간청할 수 있지만 그보다 우리의 내면에 있는 존재로서 다르마의 보호자를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렇지만 이런 관점이 곧 다르마의 보호자가 외부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내면과 외면은 늘 함께하기 때문이다. 외면과 내면을 서로 동떨어진 두 영역으로 나누는 건 이원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방식일 뿐이다. 불교의 관점에서는 외부에 있는 것과 마음속에 있는 것을 나누는 고정불변의 경계선이 없으며 내면세계와 외면 세계는 나눌 수 없는 전체이다. 마음의 내부와 외부가 똑같다고 여길 필요는 없지만 또 우리의 생각만큼 다른 것도 아니다.
출처: 티베트 마음수련법 로종 / 따렉 깝관 지음/ 켄 윌버 추천, 이창엽 옮김 / 담앤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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