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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호흡

절대적 보리심의 방편

by 마하연 2023. 1. 26.

Point 1  삶의 진실을 성찰하라

Point 2  보리심을 개발하라

 

Point 3  역경을 깨달음의 길로 바꾸어라

상대적 보리심의 방편

절대적 보리심의 방편

14. 혼란과 부정적 감정의 실재는 공空임을 보라

 

 

절대적 보리심의 방편

 

로종 수행 도중에 이따금 감정이 격해져 그것에 휩쓸리는 위험을 무릅쓰는 경우가 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감정에 깊이 빠져 슬픔과 무력감에 억눌려 꼼짝도 못 하고 결국 "너무 괴롭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고 포기한다. 이런 부정적 느낌이 지나치게 강해지면 로종 수행에 방해가 될 수 있으므로 절대적 보리심의 관점에 집중하여 그런 경향을 상쇄해야 한다. 절대적 보리심과 상대적 보리심의 이런 균형 상태가 로종 가르침의 기반이 되고 대승불교 전반의 골격을 이룬다. 아티샤가 말하는 것처럼 방편과 지혜는 의존적 존재 상태(윤회)를 극복하기 위한 두 가지 필수 요소다.

  • 방편 없는 지혜도 지혜 없는 방편도 구속이라 한다. 그러므로 어느 하나도 포기하지 마라.

불교에서 전하는사랑과 자비의 개념에는 초연함과 평정심이 들어 있다. 그런 관계를 알지 못하면 평정심과 자비심을 완전히 다른 마음 상태로 여기거나 초연함에 머물면서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초연함은 무관심과 다르다. 평정심은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는 상태가 아니다. 단지 감정 반응을 할 때 균형감을 유지하려고 사랑·자비를 초연함·평정심과 결합하려는 것이다. 대승불교의 스승들은 두 가지를 함께 갖추는 것이 하나만 불러일으키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자비심 없이 초연함만으로 다른 사람과 관계 맺는 것은 진정한 대승불교의 방식이 아니며, 평정심이 깃들지 않은 사랑으로 남을 대하면 급격한 감정 변화에 취약하게 된다. 자비심은 단순히 감정을 쏟아 내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 태도를 능숙하게 내보내는 것이다. 감정을 능숙히 표현하려면 주의를 집중해야 하며 인식이 온전하고 빈틈없어야 한다. 감정을 억누르지 않는 게 중요하고 동시에 감정을 슬기롭게 표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므로 감정에 초연함과 평정심을 불어넣는 게 중요하다. 이러한 결합이 바로 자비심을 가리킨다. 방편경『The Skill in Means Sutra』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 공경하옵는 주인님, 위대한 영웅인 보살은 모든 집착을 경계합니다. 그들은 이와 같이 상상도 할 수 없는 방편에 거하여 형태, 소리, 냄새, 맛, 감촉을 경험합니다. 그것은 모두 집착이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이지만 보살은 결코 집착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독립적 존재라는 생각에 집착하면 휘몰아치는 감정의 힘에 대해 평정심을 잃게 된다. 그리하여 머릿속에서 남들의 괴로움을 도저히 극복할 수 없어 보이는 장애물로 실체화한다. 이 문제에 대한 해독제는 지혜에 대한 명상이다. 우리가 염려하는 중생 또한 우리처럼 의존적으로 발생(연기)하고 본성이 공하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심지어 현상을 더 유연하게 인식하는 걸 방해하는 혼란조차 공의 발현이다. 왜냐하면 궁극 실재는 우리의 생각이나 감정과 따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 관점은 다른 번뇌와 더불어 분노와 질투를 다루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번뇌를 완전히 없애는 것은 아니지만 보다 수월히 가라앉히는 법을 배움으로써 번뇌를 일으키고 영속시키는 습성을 버릴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절대적 보리심과 상대적 보리심의 통합 혹은 공과 자비심의 통합은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의 한 표현이다. 감정은 항상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므로 감정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늘 합리적으로 사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반면 어떤 이들은 감정을 느끼는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추상적 사고에 지나치게 의존할 때 삶이 빈곤하게 될 위험이 있다고 주장한다. 불교의 관점은 이 두 관점의 중간쯤 된다. 부처님은 끊임없이 중도를 강조했다.

  • 가전연이여, 일상 경험은 "이것은 ~이다" 혹은 "이것은 ~이 아니 다"라는 이원성에 의존한다. 반면 다르마와 지혜에 의지하여 만물이 발생하고 사라지는 것을 직접 지각하는 사람에게는 "이것은 ~ 이다" 혹은 "이것은 ~이 아니다"라는 분별이 없다. 가전연이여, "모 든 것은 존재한다"는 주장은 한쪽 극단일 뿐이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 또한 다른 극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가전연이여, 여래는 두 극단의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으며 중도로서 다르마를 가르친다.

보살 수행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보살피려는 것이다. 윤회계에서 사는 모든 중생은 이런저런 괴로움을 겪는다. 불교에서는 강하고 권력이 있는 사람도 괴로움을 겪는다고 한다. 거만한 사람은 거만함 탓에 괴로움을 겪고, 경멸적인 사람은 멸시당하며, 부자는 재산 때문에 괴롭다. 샨티데바는 재산을 모으고 집착하고 잃는 것 그리고 끊임없이 남이 자신의 재산을 탐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상태가 얼마나 괴로운지 말해 주려 애쓴다.

  • 재산은 지키기 어렵고 상실하면 큰 고통을 주어 끝없는 불행을 초래할 뿐이니 재물을 탐내는 사람은 윤회의 고통에서 한시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마음수련의 강조점을 정치적·사회적 행동주의로 바꾸려 노력한다. 하지만 마음수련의 유일한 관심은 마음을 수련하는 것이며 행동주의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세상일에 관여하고 어떤 대의를 지지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런 일을 하더라도 더 넓은 정신적 관점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관점은 하늘만큼 넓어야 하고 행동은 정확히 우리가 마주치는 것을 향해야 한다.

 

14. 혼란과 부정적 감정의 실재는 공空임을 보라

부처의 몸kaya, 즉 '부처의 존재 양상'은 세상에 대한 깨달은 관점을 견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 화신(nirmanakaya)은 부처의 존재가 물리적으로 나타난 몸이고, 보신報身(sambhogakaya)은 부처의 지혜가 구현된 몸이며, 법신法身(dharmakaya)은 부처 존재의 초월적 측면이다. 법신은 궁극 실재와 분리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것에는 공포의 본성이 있기 때문이다. 보신은 만물의 상호 연관성을 나타낸다.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은 서로 완전히 독립적이지 않으며 존재하는 모든 것-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성스러움과 세속적인 것 - 은 사건과 과정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화신이란 만물이 공의 발현으로서 우리의 감각에 나타나는 걸 보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대승불교 문헌에서는 부처의 몸을 단지 세 가지로 말하지만, 세 측면의 불가분성을 나타내기 위해 넷째 몸을 언급하기도 한다. 이를 자성청정신自性淸淨身(svabhavivakaya) 이라 하는데, 넷째 '몸'이 아니라 앞의 세 몸을 통합하는 개념이다. 즉 부처가 육체적·정신적·초월적 측면으로 분리된 실체가 아니라 세 몸이 상호 의존적으로 통합된 불가분의 전체로서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아티샤는 이 '함께 일어남coemergent' 의 성질을 공과 자비의 측면에서 논한다.

  • 춤추는 파도와 광대한 바다 사이에 결코 분리되거나 나누어진 건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공의 자발적 함께 일어남으로부터 존재를 어루만지고 마음을 흔드는 자비가 일어난다. 아들아, 자비가 일어날 때 공으로부터 생성되며 자비가 중단될 때도 공에서 중단된다.

부처의 육체적·정신적·초월적 측면은 단지 개념적 이해의 수준에서만 구분할 수 있다. 부처 자신의 존재라는 관점에서는 그런 분리가 없다. 물이 때론 액체이고 때론 얼음일 수 있듯이 부처 존재의 세 측면은 근본적으로 서로 구별될 수 없지만 각각 따로 발현될 수 있다. 그러므로 객관적 관점과 주관적 관점에서 부처의 네 가지 몸을 이해할 수 있다. 네 가지 몸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때는 우리와 분리된 완전히 깨달은 존재를 말한다. 또 초월적으로 주관적인 관점에서 네 가지 몸을 이해할 수 있는데, 이는 자기중심적으로 주관적인 관점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마하무드라와 족첸 전통은 초월적으로 주관적 관점에서 부처 존재의 측면을 말하며, 네 가지 몸을 우리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마찬가지로 이 경구도 부처의 네 가지 몸을 우리의 경험에 적용하라고 권하므로 초월적인 주관적 해석을 잘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부처의 세 가지 몸을 상기하면 마음을 경직되게 하는 집착을 놓아 버릴 수 있다. 파담빠쌍계는 이렇게 말한다.

  • 외부와 내면이라는 개념은 마음 안에서 생겨나는 것이니 띵리 사람들이여, 단단한 얼음이 녹아 물이 되게 놓아두어라.

이런 주관적 해석에 따라 부처의 화신은 우리의 의식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 감정, 느낌이라고 이해한다. 그리고 보신은 우리의 인지능력 즉 의식의 핵심인 청정함에 연관 지을 수 있다. 법신은 생각, 감정, 의식을 인지하는 일의 공한 본성에 연관지을 수 있다. 이어서 자성 청정신은 세 가지 몸이 통합된 하나의 실재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명상 경험에 의하면 우리의 생각은 화신의 측면이다. 명상 수행을 할 때 대개 우리의 생각은 완전히 혼란 상태에서 제멋대로이다. 하지만 때때로 명확한 생각이 떠오르는 경우도 있다. 문헌에서는 이를 '불가해한 명석함'이라고 말한다. 바로 이것이 보신이다. 그런데 그 생각은 마음의 눈에는 생생하게 보이더라도 만질 수 없고 포착하기 매우 어려우며 붙잡을 수도 없다. 이렇게 붙잡을 수 없음이 법신이다. 이러한 통찰을 얻으면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다.

혼란에는 부정적 감정만이 아니라 긍정적 감정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긍정적 감정 또한 항상 감추어진 의도와 기대 즉 숨은 의도로 오염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을 비난할 필요 없으며 단지 감정반응이란 늘 복합적임을 인식하면 된다. 혼란 속에 명확함도 있음을 알 때 평정심을 개발할 수 있다. 통념과 달리 혼란은 실재를 모호하게 하지 않으며 혼란의 와중에도 실재는 결코 멀리 있지 않다. 티베트의 위대한 명상 스승인 옹뚭 갤첸Ngotrup Gyaltsen은 얽매이지 않은 마음을 이렇게 설명한다.

  • 분별은 마치 바다의 파도들과 같다. 파도가 일어나도 그 본질은 공하다. 얼마나 재미있는가, 태어나지 않는 것이 이렇게 태어남이!

대승불교의 관점, 특히 까규-닝마의 관점에서 현상과 실재는 분리될 수 없다. 대개 현상은 겉모습이고 실재는 그 뒤에 숨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또 겉모습은 많이 왜곡되어 있으며 숨겨진 실재는 전혀 불순함이 없다고 상상한다. 동양과 서양의 철학 전통에서 궁극 실재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일이 많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존재의 본성을 그렇게 보지 않는다. 불교에서는 현상과 실재 사이에 분리가 있을 수 없다고 한다. 현상과 실재가 똑같다는 의미가 아니라 둘을 분리할 수 없다는 뜻이다. 절대적 보리심의 관점을 지니면 혼란은 단지 현상일 뿐이므로 혼란의 실재는 당혹감이 아님을 알게 된다. 혼란의 실재는 공이다. 이런 관점을 가지면 부정적 감정이 생겨도 휘둘리거나 얽매이지 않을 것이다. 부정적 감정의 실재가 공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이 가장 견고한 방어이다. 그리고 샨티데바는 이렇게 말한다.

  • 꿈과 같은 중생의 상태를 잘 살펴보면 바나나 나무와 같이 실체가 없으므로 괴로움의 상태인 윤회와 모든 슬픔을 초월한 열반은 그 본질이 다르지 않습니다.

이 점을 되새기면 궁극적 관점에서 만물의 순수함을 접하게 된다. 상대적 차원에서 의존적 존재 상태(윤회)의 특성은 불만, 좌절, 괴로움과 고통이다. 하지만 절대적 관점에서 보면 만물의 평등함이 있다. 이것을 이해하고자 노력하면 역경을 수행의 길로 이용하는 데 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출처: 티베트 마음수련법 로종 / 따렉 깝관 지음/ 켄 윌버 추천, 이창엽 옮김 / 담앤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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