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int 1 삶의 진실을 성찰하라
Point 2 보리심을 개발하라
Point 3 역경을 깨달음의 길로 바꾸어라
상대적 보리심의 방편
12. 모든 책임을 하나의 적에게 물어라
13. 모든 사람의 큰 친절에 대해 명상하라
상대적 보리심의 방편
감당할 수 없는 큰 사건을 당해 괴로울 때 자신을 피해자로 여기면 괴로움은 한없이 커진다. 대개 감정을 경험하는 것은 삶에서 일어난 일을 해석하고 개인적으로 받아들이는 방식의 결과다. 그러므로 어떤 사 건이 주는 영향을 실제로 결정하는 요인은 그것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다루는 기술이다. 일정한 상황에서 똑같이 반응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건 알기 쉽다. 그렇다면 같은 사건이 일어났을 때 어떤 이는 엄청난 충격을 받는 데 비해 어떤 이는 대체로 평온을 유지할 수 있는 까닭이 무엇인지 자문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같은 사건에 대해 사람들마다 반응이 다르기 때문이다.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분야에서 누군가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처음에는 부러움을 느낀다. 이런 일은 아주 흔하다. 하지만 부러움에 계속 매달려 있으면 그 경험은 더 깊은 영향을 준다. 바로 집착에 의해 부정적 영향이 악화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나 상황에 대한 우리의 첫 반응이 항상 명백히 옳고 정확하다 고 믿기보다 괴로움의 실제 원인을 조사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 찬드라키르티는 이렇게 주장한다.
- 자신의 믿음에 대한 집착과 남의 관점에 대한 혐오, 그것은 모두 생각일 뿐이다.
도전과 어려움이 없는 인생은 그리 가치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아도 용기 있고 개방적인 태도로 삶을 마주하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게으름에 빠지는 일이 많다. 설령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아도 결코 충분해 보이지 않고, 자신의 불행을 한탄하고, 가진 것은 못마땅해하고, 가지지 못한 것은 아쉬워한다. 대개 실패와 어려움을 겪고 고생을 해 봐서 그것을 극복하는 법을 배운 사람들이 처음부터 편하게만 살아온 사람들보다 훨씬 더 잘 살아남는다. 우리는 이기적 충동을 길들일 때에만 인이 박인 행동을 중단하고 진정한 인성을 개발할 수 있다. 역경을 헤치고 나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 로종 가르침의 목적이다. 끊임없이 에고 방어하기를 중단할 때만 그럴 수 있다. 에고는 역경을 직면할 수 없고 감정의 드라마나 부정적 마음에 빠지기를 더 좋아하므로 문제가 닥치면 언제나 남을 탓한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겪는 고통과 괴로움의 크기는 외부 환경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남을 탓하면 남에게 우리를 지배할 힘을 넘겨주게 되며 영향력을 모두 빼앗긴다. 반면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면 자신이 힘을 갖고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피해자로 만드는 경향을 치유할 수 있다. 다음의 두 경구는 바로 자기 집착을 다루어 역경을 이기는 길을 말한다. 첫째는 자신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다른 사람에 관한 것이다.
12. 모든 책임을 하나의 적에게 물어라
평범한 의식 있는 존재인 우리는 자신의 이기적 욕구에 지배당한 다. 역사책에는 유명한 인물들이 지나친 욕정, 탐욕, 질투, 증오로 바라던 행운을 얻지 못했을 때 자신의 필요와 욕구를 채우려고 거짓말, 사기, 살인, 도둑질을 하다가 결국 파멸한 이야기가 많다. 한편 우리의 삶을 살펴보아도 이기적 욕망이 초래한 어려움으로 괴로움을 겪는 걸 알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게 행동하는지 잘 보여 준다. 이렇게 우리는 폭력적 관계에 갇혀 있거나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무모하게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무시하는 행위를 한다. 심지어 이기적 욕구를 채우려다 목숨이 위태로워지기도 한다.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면 할수록 더 곤란해지고 혼란에 빠진다. 사실 그런 망상은 자기기만이지만 어느 수준에서 그것이 유익하다고 오해하기 때문이다. 샨티데바는 분명히 말한다.
- 오 나의 마음이여, 헤아릴 수 없는 세월 동안 자신만의 이익을 탐했는가? 그처럼 큰 고생을 했지만 오직 고통만 얻었구나!
우리에겐 근본적으로 남의 태도와 행동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없다. 하지만 자신의 이기적 욕구를 알아차림 하면 우리와 다른 사람을 해치는 강박적 집착을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기적 마음은 욕구를 만족시켜 주겠다고 끊임없이 약속하지만 실제 이루어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이기심이 이끄는 대로 투자하고, 애쓰고, 무슨 일이든 해도 약속대로 얻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처음에 이 가르침을 오해해서 "모든 게 내 탓이야!"라고 자신을 비난한다. 하지만 로종의 가르침은 우리의 존재 전체가 아니라 이기적인 망상을 꾸짖는 것이다. 에고를 꾸짖는 건 전 존재를 나무라는 것과는 다르다. 만약 이기적 마음이 우리의 전부라면, 그것을 초월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태어나지 않는 의식인 불성이 있으므로 자기 본위적 태도를 벗어나도 자신을 완전히 없애 버리는 게 아니다. 불교에서는 여러 수준의 의식과 독특한 존재 단계에 따라 다양하게 자기 동일시를 하며 자아정체성이 구조적으로 형성되는 것은 받아들인다. 하지만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자아'는 인정하지 않는다. 불행의 원인이 이기적 마음 탓이라고 나무라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 중에서 바로 그 특정한 측면을 책망하는 것이다. 자신에게서 에고를 따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 다. 반드시 에고가 우리의 최고 사령관 역할을 맡아야 하는 건 아니다.
그래서 다르마락시타는 이렇게 말한다.
- 실상이 그러하므로 나는 적을 붙잡는다! 숨어서 나를 속인 도둑을 붙잡는다. 나를 속이고 나인 양 위장한 위선자를 붙잡는다. 아! 그것은 바로 에고에 집착하는 것이다. 틀림없다.
자신을 단일체로 여기면 어떤 변화를 일으키려는 노력도 소용없다고 오해할지 모른다. 또 에고의 파괴성을 이해하면 우리는 비참한 존재 일 뿐이라고 믿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옳은 관점이 아니며 마음수련과 수행의 목표에 이르려는 노력을 방해한다. 우리는 단지 어떤 면에서만 비참한 것이며, 그건 바로 이기적인 자기 집착이다. 그러므로 원치 않는 일이 일어날 때 남이나 다른 것을 탓하지 말고 자신이 그 일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보아야 한다. 우리의 인식이 항상 옳지는 않으며 실제 일어난 일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지 않을 수 있으므로 항상 스스로 점검해야 한다. "실제는 내 생각과 다를지 모른다. 단지 나의 왜곡된 에고의 마음이 그 상황에 무엇을 투사한 것일 수도 있다.”
우리가 부단히 모든 것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는 걸 살펴보면 불행의 진정한 원인은 자신의 마음 상태를 적절히 다루고 교육하고 변형하지 못했기 때문임을 알게 된다. 일이 잘못될 때마다 다른 사람이나 외부 의 대상을 비난하고 불편을 초래한 책임이 외부에 있다고 여기며 크게 분노한다. 하지만 설령 비난할 사람과 환경을 찾아내도 그것은 자신의 불안과 좌절과 원한을 부채질할 뿐이므로 곤경을 해결할 수 없다. 남을 탓하면 부당한 책임을 면할 수 있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단지 자신의 힘을 빼앗길 뿐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문제를 일으키지 못하게 애쓰며 평생을 보내야 하는데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병을 치료하려면 먼저 올바른 진단을 내려야 한다. 로종의 가르침은 우리가 윤회에 얽매인 상태를 올바르게 진단한 것이고 남에게 잘못이 있다고 믿는 부정확한 진단을 바로잡는 해독제이다. 샨티데바가 말하듯이 사건에 대한 우 리의 반응을 다루는 것이 실질적으로 괴로움을 줄이는 월등한 길이다.
- 온 세상을 가죽으로 덮으려면 어디서 그 많은 가죽을 구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가죽신 하나만 신으면 온 세상을 다 덮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로종의 가르침은 남을 탓할 게 아니라 자신의 이기적 마음을 바라보고 그것을 나무라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걸 부정하는 게 아니다. 사실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에 로종 문헌에서 우리가 위대한 존재와 어울리면 위대해지고 악한 사람과 어울리면 악에 물들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대승불교에서는 황금산과 독산의 신화를 통해 이것을 말한다. 황금산은 주변 지역을 황금으로 바꾸고 독산은 모든 것을 독으로 변화시킨다. 갤쎄 톡메쌍뽀는 이렇게 조언한다.
- 그들과 어울리면 삼독이 늘고, 듣고 사유하고 명상하는 활동이 쇠퇴하며, 자애심과 자비심을 잃게 된다. 그러므로 나쁜 친구들을 떠나라. 이것이 보살 수행이니라.
우리의 존재 조건을 참으로 이해하지 못하면 괴로움의 실제 근원을 통찰할 수 없다. 에고는 늘 방어 자세를 취한다. 계속해서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한지 불리한지 판단하려 애쓰기 때문에 틀림없이 편집증이 일어난다. 실은 바로 이것이 부정적 마음 상태와 우리가 겪는 고통과 괴로움이 명백히 연관되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습관적 사고방식은 여러 모로 매우 부담스럽고 마음을 허약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마음을 강하게 수련하는 로종 수행을 해야 하며 괴로움이 닥칠 때마다 남의 비난하는 행위를 중단해야 한다. 사물을 비판적으로 분석하지 않으면 실재와 전혀 동떨어진 환상의 세계 속에서 길을 잃게 된다. 그래서 샨티데바는 자기 집착과 그에 따른 번뇌를 악마에 비유한다.
- 이 세상에 가득한 모든 역경과 모든 두려움과 고통은 '나'에 대한 집착이 초래했습니다! 이 거대한 악마를 어찌해야 할까요?
불교에서는 해를 끼치는 것을 악마라고 부른다. 실제로 대승불교에서는 자기에게 집착하는 번뇌를 '네 악마' 중 하나라고 한다. 자기 집착은 단지 마음속에서만 일어나는 경험이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온갖 매우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대승불교의 가르침에서는 전혀 분별없이 행동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아니라 독을 비난하라"고 권 고한다.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극단적 행동을 하게 하는 것이 바로 독이기 때문이다. 이를 잘 이해하면 다른 사람을 대하는 새로운 관점을 기를 수 있다. 그러면 남의 행동 때문에 화내지 않고, 최악의 일이 벌어지거나 그들이 최악의 일을 저지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고, 적어도 다른 사람의 행동을 선의로 받아들일 수 있다. 아리야데바는 명확히 말한다.
- 악마에게 사로잡힌 사람이 사납게 날뛰어도 의사가 화를 내지 않는 것처럼 진리의 정복자는 번뇌를 적으로 여길 뿐, 번뇌에 얽매인 사람을 적으로 보지 않는다.
일부 서양의 불교저자들은 이경구를 약간 왜곡해서 제시했다. 서양인은 자아가 허약하므로 먼저 건강한 자아를 회복해야만 나중에 자아 를 파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라 개인적 사연이나 고뇌와 원한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려야 한다는 점을 평가절하한다. 하지만 그런 논리는 완전히 넌센스다. 로종 수행은 일상생활을 하는 데 도움이 되는 마음의 어떤 부분도 약화시키지 않는다. 참으로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만이 이런 식으로 역경을 이겨낼 수 있다. 서양인은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곱씹는 경향이 있으므로 개인적 욕구와 문제에 과도하게 집중하는 걸 그만둘 필요가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의 개념은 오해하기 쉽다. 간단히 말해 불교에서는 에고를 포함한 모든 현상에는 고정되고, 변치 않고, 유일하며, 다른 것들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실체가 없다고 말한다. 상대적 세계에서 수월하게 에고를 제거할 수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에고는 어떤 역할을 하는 우리의 중요한 일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수련을 하면 수행할 때 에고의 에너지를 이용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삶에서 해결이 어려운 면을 변형하여 초월적 관점을 지니고 수행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13. 모든 사람의 큰 친절에 대해 명상하라
요람에서 무덤까지 남들은 우리에게 많은 일을 해 준다. 설령 우리가 사랑받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다고 생각해도 사실이 그렇다. 특히 우리가 아기였을 때 만일 다른 사람들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다른 사람들이 세상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 살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제대로 배웠다고 생각하든 그렇지 않든 사람들은 교육을 제공하고 굶주리지 않게 해 주었다. 사실상 우리가 느끼는 즐거움, 기쁨, 행복은 모두 남들의 존재와 활동에 의해 이루어진다. 수많은 사람이 식품을 생산하고 포장해서 유통하는 일을 하기에 우리가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우리가 마시는 물, 입는 옷, 사용하는 전기와 가스를 비롯한 다른 수많은 것도 다른 사람들의 활동이 있기에 이용할 수 있다. 식당 웨이터는 음식을 가져다주고, 호텔 직원은 인사를 하고 때론 반갑게 이름도 불러 주며, 버스 기사는 우리를 목적지에 데려다주고 인사말을 주고받는다. 이처럼 우리는 살기 위해 남들에게 의지해야 한다. 비록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의 친절함을 가장 무심히 지나치는 일이 많기는 하지만 마땅히 감사해야 하는 건 가깝고 친밀한 사람들만이 아니다.
남의 행동에 습관적으로 대응하면 모든 것이 우리에게 대항하는 것으로 보이며 그렇게 느껴지기 때문에 무력하게 된다. 이렇게 경직되고 협소하며 습관화된 관점에서 벗어날 수 있으면 새로운 태도로 상황을 포용하는 힘을 기를 수 있다. 그러면 모든 상황이 더 원만해 보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남들이 기회만 있으면 우리를 이용하려 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기방어적인 태도로 다른 사람을 의심한다. 그러므로 어느 것도 당연히 여기지 말고 남들의 친절에 감사해야 함을 거듭 상기해야 한다.
우리를 곤란하게 하고 방해하는 상황과 여건, 사람들은 늘 있기 마련이다. 이 경구는 구체적으로 부정적 상황에 부딪쳤을 때 남들의 친절함을 생각하라는 가르침을 준다. 또 우리는 오직 시험을 당할 때만 정신적·심리적으로 성장할 수 있음을 기억하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를 곤경에 빠뜨린 사람들을 좋게 생각하려 노력해야 하고, 그런 부정적 상황을 오히려 더 현명하고 강해질 수 있는 수행의 기회로 바꾸어야 한다.
샨티데바는 이렇게 말한다.
- 그러므로 집안에서 쉽사리 보물을 얻은 것처럼 내가 찾아다니지 않아도 적들이 나타나
보살행을 하도록 도와주니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아무리 나쁜 상황에서도 이것은 사실이다. 까담파 스승들은 우리가 장애와 역경을 극복할 때마다 그만큼 더 총명해지고 적응력이 좋아진다고 말한다. 다양한 경험이 쌓일수록 삶이 풍요로워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스승 모두 역경에 굴하지 않고 그것을 다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표현과 권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모두 우리가 역경을 통해 성장한다고 말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른바 "영혼의 어두운 밤"을 말하며 어둠에 굴복하지 말고 어둠을 빛의 징조로 보라고 훈계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역경이 으레 우리를 파괴한다고 여기면 안 된다. 까담파 가르침에서는 경험의 거름이 보리bodhi (깨달음)의 밭을 기름지게 하는 비료가 된다고 거듭 말한다. 다르마락시타는 『독을 파괴하는 공작의 마음수련」에서 이렇게 말한다.
- 남의 배은망덕을 기꺼이 포용하는 보살의 갑옷을 입지 않으면 윤회에 갇힌 사람에게 행복이 오지 않으리라. 그러므로 달갑지 않은 모든 것을 기꺼이 받아들여라.
역경 자체가 아니라 역경에 대처하는 방식이 삶에 어떤 영향을 줄지 결정한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면 자연히 있는 그대로의 삶을 더 깊은 의미로 받아들이기 시작할 것이다. 나쁜 습관이나 실수 때문에 자신을 비난해서 실제 상황보다 더 불행해지는 경우가 흔하다. 또 남의 실수에서 교훈을 얻어 그런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고 혼란을 악화시키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어떤 이가 비난받을 만한 행동을 했다고 여길 때 그를 비난하기보다 자신의 행동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그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겠다고 결심해야 한다. 남의 행동으로 인해 끊임없이 화가 날 수 있지만 자신의 반응을 들여다보면 종종 우리도 그렇게 행동하면서 자신에게는 더 관대하다는 걸 알게 된다. 이처럼 정직한 내적 성찰을 통해 균형 잡힌 시각을 갖는 것은 '남을 탓하기를 삼가라'는 로종의 가르침을 잘 따르는 것이다. 그럴 때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더 객관적으로 보게 되고 남에게서 긍정적인 점을 배울 가능성이 많아진다. 누구나 자신의 업을 쌓아 왔고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업보를 감당해야 한다. 아무도 그것을 모면할 수 없다. 남의 행동에 대해 판결을 내리는 심판자가 되려는 태도는 아무 소용이 없다.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무슨 일을 하든 정신적 관점을 견지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의 경험밖에 없다. 분노와 두려움 없이 역경에 대처하는 법을 배우면 자신의 경험을 더 능숙하게 다룰 수 있다. 찬드라키르티는 이렇게 말한다.
- 다른 사람이 그대를 해칠 때 그에게 화를 내면 그대가 입은 손상을 분노가 없애 주는가? 원한은 이번 삶에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며 내생에서 역경을 초래한다.
출처: 티베트 마음수련법 로종 / 따렉 깝관 지음/ 켄 윌버 추천, 이창엽 옮김 / 담앤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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