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int 1 삶의 진실을 성찰하라
Point 2 보리심을 개발하라
절대적 보리심
상대적 보리심
7. 두 가지를 호흡에 실어 주고받는 수련을 하라
상대적 보리심
상대적 보리심이란 자비심을 기르는 것이다. 자비심은 다른 덕성이 자랄 수 있게 해 주는 수분과 같다. 그러므로 만일 이기적이고 남에게 무관심하게 행동하며 다른 덕성도 우리의 존재 안에 뿌리내릴 수 없다. 자비심 수행은 이기적이지 않은 관점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길을 개발하고 자신을 평가하기를 배우는 것이다. 이기적 인식은 망상적 인식이므로 항상 번뇌와 망상의 정신 상태에 빠지게 한다.
상대적 보리심을 수행하면 이기주의를 초월할 수 있는 지성을 개발하게 된다. 그런 변화를 일으키는 데 필요한 광대한 관점을 얻으려면 절대적 보리심을 수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상대적 보리심은 비파사나(통찰) 명상의 통찰에 기반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 단지 착한 사람이 되고 선한 마음을 갖는 것만으로는 정신적인 사람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세속적인 친절은 자비로운 행위에 지성과 평등심을 불어넣는 초월적 의식 상태와 다르다는 걸 알아야 한다.
대승불교의 주요 학파인 중관학파 창시자들인 나가르주나, 아라야데바, 찬드라키르티와 다른 대승불교 학파인 유식학파를 창시한 아상가(4세기), 바수반두(330~400) 등 위대한 스승들의 권위 있는 업적은 불교의 발전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당시 저자들 대부분은 책의 첫머리에서 부처들과 보살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게 관행이었다. 그런데 그와 달리 찬드라키르티가 『입중론』의 첫머리를 자비심을 찬미하는 노래로 시작한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 성문승들과 불성佛性에 이르는 도중인 이들은 위대한 성인에게서 태어난다. 그리고 부처들은 보살 영웅들로부터 태어난다. 자비, 불이성不二性, 남을 위해 불성을 얻으려는 소망이 (진리의) 정복자의 자녀가 되는 근원이다.
- 자비는 불성의 풍성한 수확을 낳는 씨앗이다. 더 많은 수확을 거두게 하는 물과 같고 지속적인 행복의 상태로 익게 만든다고 한다. 그러므로 맨 처음에 자비를 경축하노라!
사랑과 자비에 대해 명상하는 것이 여행을 준비하는 것과 같다면 보시 바라밀, 인욕 바라밀, 정진 바라밀, 지계 바라밀을 수행하는 것은 실제로 여행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예비적인 것들의 수행에서 말하듯이, 만일 여행 전에 충분히 고려하고 철저히 대비하지 않으면 나중에 아무리 애를 써도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끝내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에 가로막힐 것이다. 따라서 일상생활에서 보살의 길을 실행하려면 먼저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수련해야만 한다. 티베트 불자들은 생각하는 마음을 강조할 때 로lo라는 말을 사용하므로 로종lojong 수행을 습관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마음을 수련하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로도lodro는 '지성'을 의미하고 매우 훌륭한 지성을 로도 첸뽀 lodrochenpo 즉 '위대한 지성'이라고 한다. 로종 수행은 단지 성찰 방법이 아니라 보고 생각하고 느끼고 인식하는 마음의 활동을 모두 변화시키는 수단이다.
그러므로 상대적 보리심에는 두 측면이 있다. 첫째는 남을 유익하게 하려는 의도이고 둘째는 남을 위해 일하는 실제 행동이다. 상대적 보리심의 성찰적인 면은 자비심을 명상하는 것이고, 활동적인 면은 일상생활에서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자비심을 성찰하는 것과 자비심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명확히 구별하지 않는다. 먼저 마음속에 보리심을 일으켜야만 진정 자비로운 행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적 보리심을 기르려면 순수한 의도가 있어야 하므로 행위보다 의도가 우선해야 한다. 샨티데바는 그것을 여행에 비유한다.
- 깨달은 마음인 보리심에는 간단히 말해 두 측면이 있으니 첫째는 보리심을 일으키는 원보리심이고 둘째는 실천하는 행보리심입니다.
- 여행하려 마음먹는 것과 실제로 길을 떠나는 것은 다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그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원보리심과 행보리심에 점진적으로 순서가 있음을.
단지 눈에 보이는 고통을 겪는 중생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을 향한 자비심을 기른다. 전혀 어려움 없이 사는 존재는 없으므로 모든 존재에게 자비심을 보내야 한다. 그리고 자비심이 맹목적 감정에 빠져 무분별한 행동을 초래하지 않도록 평등심을 유지하도록 유의해야 한다. 그러려면 자비심에 지성이 충만해야 한다. 단순히 남을 돌보는 것만으로 자비심이 현명하게 표출된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자비심과 보리심에 의한 자비심인 '대자비심'을 구분해야 한다.
이런 변화를 일으키려면 사랑과 자비심을 성찰하는 것이 실제로 사랑하고 자비롭게 행동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사랑과 자비심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과소평가하면 안 된다. 근본적으로 다르게 생각하는 데 익숙해지지 않고서는 결코 자비로운 행동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개 자비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고통받는 것"이라고 이해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는 그렇지 않다. 불교에서 자비는 다른 사람이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는 것이고 실제로 사람들이 병든 몸과 괴로운 마음에서 벗어나 있기를 상상함으로써 자비심을 불러일으킨다. 샨티데바는 이렇게 힘주어 말한다.
- 제가 의지할 데 없는 이들의 보호자가 되고 여행자들의 안내자가 되며 길을 건너는 이들에게 배가 되고 뗏목이 되고 다리가 되게 하소서.
- 제가 육지를 찾는 이들에게 섬이 되고 불법을 찾는 이들에게 등불이 되며 쉴 곳을 찾는 이들에게 쉼터가 되고 하인이 필요한 이들에게 노예가 되게 하소서.
단지 사랑과 자비심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그 소망이 사실상 실현할 수 없는 것일 때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우리가 다리나 노예가 될 수 없다는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핵심은 다른 사람에게 유익한 일을 하고 싶다는 바람이다. 그런 바람을 품으면 내면에서 다른 사람들을 향한 사랑과 자비심이 자연스레 일어난다. 이는 일반적으로 어떤 일을 할 때 실현 가능성이 없는 일은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다고 여기는 것과 다르다. 여기서 요점은 자비로운 생각을 할 때 자비로운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상대적 보리심을 개발하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자기중심적 태도를 바꾸어 '상대'를 자신과 동등하게 여기는 태도를 기르는 것이다. 로종 수행의 토대인 그런 태도를 기르면 자기애의 경향이 자연히 감소하므로 일부러 이기심을 억제할 필요가 없다. 까담파 스승들은 우리의 고통을 다른 사람들 탓으로 여겨 끊임없이 남을 비난하는 것이 진정한 문제라고 말한다. 이기적으로 자신의 욕구를 채우려 함으로써 이기적인 마음이 제멋대로 하게 놓아두고 지칠 줄 모르고 자신을 학대한다. 이렇게 강박적으로 자신만의 행복을 얻으려는 경향은 자존감을 높이거나 행복하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외로움과 관계의 단절을 악화시킨다. 행복을 원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서라도 행복을 얻으려는 것이 문제이다.
자기를 보호하려고 다른 사람을 해치면 자신에게도 매우 해롭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마음수련을 하는 버팀목이다. 삶이 빈곤하다고 느끼는 감정을 만족감으로 바꾸는 유일한 방법은 이기적 태도를 거꾸로 돌려 다른 사람의 행복을 바라는 데 집중하는 것이다. 티베트 불교의 위대한 스승 양괸빠는 『마음 수련의 가르침』에서 이렇게 말한다.
- 다른 사람의 행복을 고려하도록 생각을 수련하라. 이 핵심에 의해 틀림없이 그대가 하는 모든 일이 수행이 된다.
이런 태도의 중요성을 이해할 때 로종 수행은 또한 자신의 고통을 줄이는 수단임을 알게 된다. 남에게 부정적 태도를 품는 건 곧 자신을 파괴하는 습성이고 자신의 욕구에 집착하면 결코 만족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신의 경험을 성찰하고 행동의 동기가 무엇인지 명확히 알아야 한다. 상대적 보리심을 이해하면 "때로는 내가 살아남기 위해 다른 사람을 해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있다. 이런 태도를 뒤바꿀 수 있으면 남에게 유익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 또한 대단히 만족스러워질 것이다.
서양인은 다른 무엇보다 행동을 가치 있게 여기지만 불교에서는 행동의 이면에 있는 동기를 훨씬 더 중요하게 여긴다. 행위의 동기를 분석해 보면 본질적으로 남을 도우려는 욕구와 해치려는 욕구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두 욕구는 종종 가까이 있고 혼동하기도 쉬우므로 우리가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어도 늘 선의를 다시 살펴보아야 하는 문제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우리가 행동하는 의도는 언제나 분별하는 판단에서 비롯되고 우리는 언제나 행복은 더 늘리고 고통은 줄인다고 여기는 것을 하려 한다. 나쁜 의도로 하는 행위도 목적은 똑같다. 그러므로 행위의 이면에 숨은 자기 기만을 꿰뚫어 보려면 마음속의 여러 의도와 목적을 온전히 자각해야 한다.
두 가지를 호흡에 실어 주고받는 수련을 하라
주고받기 수행(통렌)은 상대적 보리심을 개발하는 성찰 수행이다. 우리는 보통 싫어하는 것을 거부하고 좋아하는 것에 집착하는데, 통렌 수행은 그런 일반적 경험에 반대되는 반직관적 수행이다. 통렌 수행을 하는 이유는 우리의 행위가 마음의 습성을 그대로 따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정적인 마음의 습성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생각과 행동으로 결코 자비를 베풀 수 없다. 샨티데바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태도를 개발하는 예를 다음과 같이 보여준다.
- 길을 잃어 괴로운 사람은 동료 여행자를 만나게 하시고 도둑이나 포악한 맹수를 피해 안전하게 하시고 지치지 않고 수월히 여행하게 하소서.
통렌 수행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관점으로 사물을 보게 한다. 자신의 삶에서 좋은 것을 모두 남에게 주고 남의 삶에서 나쁜 것을 모두 가져 오므로 "자신을 남과 바꾸기"라고 한다. 통렌 수행은 용기를 기르는 수련으로 걱정과 두려움이 덜하도록 수련하는 것이 요점이다. 통렌수행이 잘 되면 남에게 사랑과 자비를 느끼는 능력과 남의 고통을 떠맡으려는 용기가 커진다. 통렌 수행은 모든 걸 방어하는 자세로 생각하는 습성을 멈추는 수련이므로 매우 유익하다. 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일수록 더 방어적 태도를 취하게 된다. 반대로 다른 이와 행복을 나누기를 원하면 자신에게 덜 집착하게 되고 번뇌는 자연히 가라앉는다. 갤쎄톡메 쌍뽀(1295~1369)는 『서른일곱 가지 보살 수행』에서 이렇게 조언한다.
- 모든 고통은 자신의 행복을 바라는 데서 비롯된다. 완전한 부처들은 남을 도우려는 생각에서 태어난다. 그러므로 자신의 행복을 남의 고통과 바꾸어라. 이것이 보살 수행이니라.
자기 집착에는 자신의 가치를 과대평가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과 자기비판도 포함된다. 일반적인 두려움과 달리 마음속으로 남이 고통을 떠맡는 것은 자신의 고통을 악화시키지 않으며 오히려 삶을 풍요롭게 한다. 끊임없이 괴롭히는 문제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심리에 깊은 변화를 가져온다. 자기 집착에 얽매이면 우리의 존재는 오그라들고 스스로 내면의 불안에 갇힌다. 하지만 자기 집착의 해독제인 통렌 수행을 하면 마음이 고양되고 광대해진다. 샨티데바는 이렇게 말한다.
- 낙담하지 말고 혼신의 힘을 다해 용기를 가지고 자제력을 기르세요!
- 나와 남을 동등하게 여기는 수행을 하고 나와 남을 바꾸는 수행을 하세요.
실제로 통렌 수행을 할 때는 삼보三寶에 귀의하는 것으로 시작해 예비적인 것들을 성찰하고 자연스러운 상태에 머무른다. 이어서 비파사나(통찰) 명상을 하고 다시 자연스러운 상태에 머무른다. 그 상태에서 통렌 수행을 한다. 다른 사람들이 고통받고 해로운 일을 겪는 것만을 떠올린다. 남들이 질병의 고통, 상실의 고통과 괴로움, 가난의 박탈감과 고뇌, 정신 질환의 혼란과 괴로움, 번뇌에 좌절해 괴로운 모습을 상상한다. 그런 남의 고통을 모두 들숨과 함께 자신에게로 받아들인다. 이어서 자신이 행복한 것만을 생각한다. 소중히 여기는 것, 사랑과 친밀감을 느껴 가슴에 품은 특별한 추억, 자신을 편안히 대했던 순간을 상상하고 숨을 내쉴 때 그것을 남에게 보낸다.
또 다른 사람의 삶에서 고통의 원인과 조건을 들이쉬고, 남의 행복에 필요한 원인과 조건을 내쉰다. 실제로 괴로움을 경험하면 우리는 번뇌 탓에 괴로워하며 쇠약해진다. 그 번뇌는 다시 같은 고통과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 따라서 번뇌는 괴로움의 원인이자 결과이며 윤회라는 악순환을 초래한다. 통렌 수행에서는 이 모든 것을 받아들여 남을 쇠약하게 하는 것을 들이쉬고 남의 기쁨의 원인이 되는 것을 내쉰다.
운동으로 몸을 단련하듯이 로종 수행은 마음을 단련한다. 그런데 건강해지려는 방법이 매우 잘못된 경우가 있다. 끊임없이 음식을 먹고 많이 쉬어야 몸에 좋다고 여기지만 그것이 항상 건강에 좋은 건 아니다. 몸을 너무 아끼고 제멋대로 놓아두면 점점 작은 불편에도 예민해져 아주 사소한 자극도 대단한 결핍으로 여기게 된다. 몸이 건강하면 꽤 먼 길도 어렵지 않게 걸을 수 있지만 건강하지 못하며 집 밖에 나가는 것도 힘들다. 불편과 병을 두려워할수록 더 불편하게 느끼고 병세가 더 심해 보일 것이다. 마음이 약할 때 감기에 걸리면 아주 녹초가 되고 많이 아플 수 있으며 때로는 더 심각한 병에 걸릴지도 모른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음을 제대로 수련하지 않으면 무기력하고 게을러져 사소한 불쾌감도 큰 모욕으로 여긴다. 샨티데바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 인간의 몸은 애지중지하면 할수록 바로 그만큼 바로 그 정도로 더 예민해지고 허약해집니다.
에베레스트 산에 오르려는 사람이 훈련으로 지구력을 키우듯이 통렌 수행은 용기와 결단력을 길러준다. 심리적으로 어려움에 대처하는 준비를 하면 시련과 고통이 닥쳐도 그리 힘겹지 않을 것이다. 윤회에 얽매인 마음은 매우 허약하고 쉽게 성내지만 강인한 마음은 어떤 일이 일어나도 잘 견딘다. 로종 수행에서 이 밖에 다른 것은 부차적이다.
통렌 수행을 처음 접하면 많은 혼란과 의심이 일어날 수 있다. "통렌 수행을 하면 항상 남의 고통을 생각하느라 완전히 비참해지고 말 거야."라고 염려하거나 안 좋은 일이 생기면 통렌 수행 때문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이런 두려움은 오해일 뿐이다. 통렌 수행으로 우리 삶에 불행과 혼란을 불러들일 수는 없다. 실제로 남의 고통을 함께 겪고자 통렌 수행을 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암 환자의 고통을 통렌 수행으로 받아들일 적에 "이제 나는 암에 걸릴 거야"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남의 고통을 떠맡는 걸 시각화할 때 그 고통은 우리 내면에서 즉각 사라지는 것이다.
한편 자신에게는 남에게 베풀 사랑이 없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나는 텅 빈 것 같아요. 내면에 아무 것도 없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이러한 경험이 흔한 까닭은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신에게 집착했기 때문이다. 형제자매가 있는 사람은 어렸을 때 자신의 몫을 다 먹고 나서 형제자매의 음식까지 더 먹고 싶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누이나 형의 장난감을 갖고 싶어 하고 얻지 못하면 떼를 쓰기도 했다. 우리가 느끼는 공허함은 남에 대한 사랑과 자비가 없는 상태이다. 반대로 남에게 사랑과 자비의 선한 감정을 느낄 때는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존재의 위기를 느끼지 않는다. 남을 보살피는 마음이 있을 때 자신도 보살핌을 받는다고 느낀다. 보살피는 마음이 있는 사람만이 실제로 보살필 수 있고, 그런 사람은 자신의 돌보는 태도에 의해 스스로 보살핌을 받는다. 남을 보살피는 자질을 개발할 수 있으면 남이 흘리는 사랑의 부스러기라도 주우려고 여기저기 헤매고 다닐 필요가 없을 것이다.
부처들은 괴로움을 초월한 존재인데 어떻게 남의 괴로움을 나눌 수 있는가? 우리와 함께 괴로워하고 우리의 괴로움을 나누는 부처 같은 것은 없다. 부처들도 인간이었으므로 괴로움을 겪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기에 그들의 자비심은 그침이 없고 무한하다. 부처들이 더 이상 괴로움을 경험하지 않으면서도 괴로움에 대해 아는 건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다. 괴로움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불교의 핵심이다. 괴로움이란 고통과 고통을 피하려 애쓰는 마음이 함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집착과 회피하려는 마음을 없애면 고통만 남는다. 그것은 괴로움과 다르다. 만일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여전히 괴로움을 느낀다면 일체의 마음수련과 힘겨운 수행이 아무 쓸모 없는 것이다.
통렌 수행을 할 때 말 그대로 우리의 외부로 나가거나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숨을 들이쉴 때 다른 사람의 병, 고뇌, 슬픔, 육체의 아픔, 마음의 고통을 떠맡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또 숨을 내쉴 때 사랑하는 마음과 보살피는 태도를 내보내고 우리가 남에게 도움이 될 만큼 강하다고 상상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한편 통렌 수행이 단지 마음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므로 현실에서 아무에게도 영향을 줄 수 없다고 의심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불교의 관점에서 만물이 상호 연결되어 있으므로 통렌 수행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 우리의 이기심과 곤궁이 남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처럼 우리의 긍정적 태도 또한 실제로 남에게 영향을 준다. 하지만 로종 수행은 궁극적으로 자신을 위한 것이지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걸이 아니다. 우리가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소망을 부지런히 내쉬어도 실제로 세상을 바꾸지는 못한다. 하지만 훌륭한 덕성을 내쉬고 끔찍한 고통을 들이쉬면 자신에게 실체적이고 매우 깊은 변화가 일어난다. 인생에서 부딪치는 온갖 고난과 고통스러운 경험은 자기와 타자의 관념에 집착하는 탓에 생긴다. 반면 자신을 남과 바꾸려는 수행을 하면 이기적인 마음의 한계를 넘을 수 있으므로 자아를 초월하는 경험을 한다. 습관적인 이기주의에 갇힌 상태에서 벗어나는 걸 경험하기에 자기 자신보다 더 큰 존재가 된다. 로종의 태도를 가지면 이전에 접근조차 할 수 없을 것 같던 문제들을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게 된다. 이렇게 우리의 관점을 바꾸는 능력을 개발할 기회를 준 다른 사람들에게 감사함을 느낄 때 통렌 수행의 진정한 수혜자는 바로 우리 자신임을 깨닫게 된다.
출처: 티베트 마음수련법 로종 / 따렉 깝관 지음/ 켄 윌버 추천, 이창엽 옮김 / 담앤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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