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꿈의 본성
꿈과 현실
경험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에너지 바디
요약: 꿈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마더 탄트라의 이미지들
▷ 은유적 가르침
꿈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깨달음에 앞서, 인간의 진정한 본성은 개념적인 마음을 만든 근원적인 무지에 가려져 있다. 이원적인 시야에서, 개념적인 마음은 경험의 경계가 없던 통합을 개념적인 독립체로 나누고 이러한 정신적 투사들을 마치 원래부터 분리된 존재 및 사물이었던 것처럼 이해한다. 근원의 이원론은 경험을 자신과 타인으로 구분한다. 그리고 이런 자기규정으로부터 오직 경험의 한 측면, 즉 자신만을 겪게 되며 선호하는 것이 생긴다. 바로 여기서 신체적, 정신적 행동의 바탕이 되는 혐오와 욕망이 발생한다. 이러한 행동(카르마)들은 개인의 마음에 조건화된 경향성으로서 업의 흔적을 남긴다. 조건화된 경향성은 더 큰 집착과 혐오를 낳아 새로운 업의 흔적으로 이끌고, 이것이 계속 반복된다. 이것이 바로 저절로 계속 돌아가는 업의 사이클이다.
자는 동안 마음은 감각 세계에서 멀어진다. 이때 업의 흔적은 그것이 나타나는데 필요한 힘 또는 에너지인 업의 프라나, 즉 이차적 원인에 의해 자극을 받은 상태다. 말과 기수의 비유에서처럼, 마음은 업의 흔적이 활성화되는 신체의 에너지 센터로 가기 위해 업의 프라나에 '올라탄다'. 이렇게 하여 의식이 특정 차크라에 집중된다.
마음, 에너지, 의미, 의식의 조명은 관련된 세계의 속성 및 업의 흔적에 영향을 받아 상호작용한다. 업의 프라나는 마음이 색깔, 빛, 감정, 이미지 같은 특정한 업의 흔적들의 표현을 유의미한 이야기, 즉 꿈으로 엮어내는 동안 꿈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에너지이다. 이것이 바로 윤회하는 세상의 꿈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마더 탄트라의 이미지들
위대한 완성(족첸)의 가르침에서 주요 주제는 언제나 우리가 우리의 진정한 본성을 알아차리고 있는가, 그리고 이 본성의 반영이 경험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꿈은 우리 자신의 마음을 반영한다. 부처가 깨달음 후에 윤회하는 세계의 실체들과 대상들이 환상에 불과한 것임을 알았듯이 꿈에서 깨어난 뒤에 이것을 알기는 쉽다. 잠들어 있는 동안 꿈의 본질이 환상에 불과한 것임을 알아차리는 연습을 하는 것과 같이, 우리는 깨어 있는 삶의 본질이 환상에 불과한 것임을 깨닫는 연습을 해야 한다.
꿈이 어떻게 생겨나는지에 대한 이해가 있으면 '환상에 불과한 것'과 '본질적 존재의 부재'가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기 쉬워질 것이며 이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우리의 경험에 이 이해를 적용하는 것이 쉬워질 것이다. 경험이 생겨나는 과정은 우리가 깨어 있을 때나 꿈을 꿀 때나 동일하다. 세상은 꿈이고 스승과 가르침도 꿈이며 우리가 한 수행의 결과 또한 꿈이다. 우리가 순수한 릭빠에 이르러 해탈할 때까지는 꿈 아닌 것이 없다. 이렇게 되기 전까지 우리는 꿈의 차원에서 그리고 물리적 차원에서 계속해서 자기 자신과 자신의 삶을 꿈꾼다.
생각을 다루는 법을 알지 못하면 그 생각에 지배받는다. 생각을 다루는 법을 안다는 것은 그 생각이 알아차려져서 긍정적인 목적 및 고결한 행위에 쓰인다는 의미이며 생각의 공의 본질로 해방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영적 여정에서의 생각의 쓰임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망상, 고통, 어떠한 경험 등 모든 것을 영적 여정에 활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모든 것이 공한 것이라는 정수를 이해해야만 한다. 이렇게 되면 삶의 모든 순간이 자유로워지며, 모든 경험이 영적 수행이 된다. 모든 소리는 만트라이며 모든 형상은 순수한 공이고 모든 고통은 가르침이다. 이렇게 삶 자체가 깨달음의 '길이 된다.'
마치 꿈처럼 분노에는 객관적인 근거가 없으며 그것이 오직 마음의 반영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 즉시, 분노의 매듭은 느슨해지며 더 이상 분노에 속박되지 않게 된다. 뱀인 줄 알고 두려워했던 것이 실은 밧줄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그것의 형상이 지녔던 힘은 사라진다. 형상이 공함을 이해하는 것은 마음과 경험이 통합된 것임을 알아차리도록 훌륭하게 이끈다.
티베트어에는 '룬둡'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스스로 완전하다'라는 뜻으로 번역할 수 있다. 이 말은 무언가를 생산하는 생산자가 없다는 뜻이다.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이며 이 모든 것은 공함과 명료함의 완벽한 표현인 근본 바탕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크리스털은 스스로 빛을 만들지 않는다. 크리스털의 자연적인 기능은 단순히 빛을 반사하는 것이다. 거울은 반사할 얼굴을 선택하지 않는다. 거울의 본질은 모든 것을 비춰주는 것이다. 우리가 평소의 자아감을 비롯한, 이 세상에서 발한 모든 것들이 그저 마음의 투사일 뿐임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자유로워질 것이다. 이러한 이해가 없는 것은 마치 신기루를 실제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고 메아리를 우리 자신이 낸 소리가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다. 분리의 감각은 강력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환상에 불과한 이원론에 갇히게 된다.
마더 탄트라는 뵌 전통에서 가장 중요한 경전 중 하나이다. 이 경전은 우리가 꿈과 깨어 있는 삶 둘 다 본질적으로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예시, 직유, 은유를 담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들을 깊이 숙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반사: 꿈은 우리 마음의 투영이다. 한 줄기의 햇볕이 하늘에 있는 태양의 빛으로부터 나오듯이 꿈도 우리 마음에서 나온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면 사자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으르렁거리는 모습과 같이, 꿈을 마치 진짜인 것처럼 여기면서 그것에 사로잡히게 된다. 꿈에서 나오는 하늘은 우리의 마음이고, 산도 우리 마음이다. 꽃, 우리가 먹는 초콜릿, 다른 사람들 등 꿈속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을 우리 자신에게 투영해 주고 있다.
● 번개: 밤하늘에 번개가 번쩍인다. 갑자기 빛을 받게 된 산봉우리들은 각각이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경험하는 것은 우리 눈에 반영되어 돌아온, 하나의 번갯불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꿈속에서 분리되어 보이는 물체들도 사실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하나의 빛, 릭빠의 빛일 뿐이다.
● 무지개: 무지개처럼 꿈도 아름답고 매혹적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실체가 없다. 이것들은 빛의 드러남이자 관찰자의 관점에 의존하는 것들이다. 우리가 이것들을 쫓아가더라도 결코 닿을 수 없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꿈은 무지개와 마찬가지로 환상이 발생하는 다양한 조건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환영이다.
● 달: 꿈은 연못, 우물, 바다 등 다양한 물 위에 비친 달과 같다. 또는 마을의 여러 창문에 비친 달이나 다양한 크리스털에 비친 달과 같다. 달은 여럿일 수 없다. 달은 오직 하나뿐이며 마찬가지로 꿈속의 많은 대상들도 하나의 본질에서 비롯된다.
● 마법: 마법사는 돌 하나를 처음에는 코끼리로, 그다음에는 뱀으로 그다음에는 호랑이로 보이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상들은 환상에 불과하며 꿈속의 대상들처럼 모두 마음의 빛으로 만들어지는 것들이다.
● 신기루: 이차적 원인으로 인해 사막, 불빛이 반짝이는 도시 또는 호수에서 신기루가 보일 수 있는데, 그것에 가까이 가보면 아무것도 없음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꿈의 이미지를 파헤쳐 보면 그것이 신기루와 같이 실체가 없는 환영, 즉 빛의 장난인 것을 알 수 있다.
● 메아리: 메아리를 칠 수 있는 곳에서 큰 소리를 내면 그 소리가 우리에게 돌아온다. 조용한 소리는 조용한 소리로 돌아오고 이상한 외침은 이상한 외침으로 돌아온다. 우리가 듣는 소리는 우리가 만들어낸 소리다. 마찬가지로 꿈의 내용이 우리와 무관한 것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투사되었던 마음이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것일 뿐이다.
이 예들은 본질적 존재의 부재뿐 아니라 경험과 경험하는 사람이 하나임을 강조한다. 이것을 수트라에서는 '공', 탄트라에서는 '환영', 족첸에서는 '단일 구'(single sphere)라고 부른다. 자아와 경험의 대상은 하나다. 우리의 내적 세계와 외적 세계는 단지 우리 자신이 드러난 표현이다. 사람들은 집단적인 업을 공유하기 때문에 같은 세상을 공유한다. 우리가 겪는 경험의 종류, 그리고 경험이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따라 경험이라는 현상을 어떻게 보게 되는지가 결정된다. 우리는 분리된 존재와 대상들이 각자 고유한 존재라는, 실체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믿는다. 무언가가 저기에 있다고 믿으면 그것은 정말 거기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우리에게 영향을 준다. 우리는 우리가 반응하는 세상을 스스로 만든다.
우리가 사라지면 다른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그대로 남아 있지만 우리 자신의 세상은 사라진다. 우리의 인식과 모든 것을 보는 방식이 우리와 함께 끝난다. 이원적 사고를 해소하면 본질적인 순수함이 저절로 드러난다.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이 세상에 고유한 존재란 없다는 것을 직접 알게 되면, 무엇을 경험하든 간에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힘도 행사할 수 없다. 사자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진짜라고 착각하면 깜짝 놀라 으르렁거린다. 그러나 반사된 것이 본질적으로 환영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해하면 사자는 두려움으로 반응하지 않게 된다. 진정한 이해가 없으면 우리는 자기 마음의 투영을 실제로 착각하고 혐오 또는 집착으로 반응하여 업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진정한 본성인 공을 알게 되면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다.
은유적 가르침
마더 탄드라는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무지의 잠을 암실에 비유한다. 알아차림은 램프의 불꽃에 해당한다. 램프가 켜지면 어둠이 사라지고 실내가 밝아진다.
은유와 상징을 통한 교육은 언어로 영적 가르침을 전달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다. 하지만 이것들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는 요령이 필요하다. 종종 학생들은 은유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래서 나는 은유와 상징적인 이미지를 다루는 가장 좋은 방법에 대해 덧붙이고자 한다.
가르침에서는 추상적이고 전문적으로 국한된 설명보다는 감각적인 경험을 불러오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물론 실제 경험은 어떤 언어로도 쉽게 전달할 수 없긴 하지만, 가르침에서 이미지는 이성적인 마음 이상의 것을 인식할 수 있게 도와준다. 이러한 은유들은 시 속의 심상과 같이 경험되어야 한다. 이것들은 숙고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고, 실험해 보고, 경험으로 통합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불'이라는 말을 들을 때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단어에 머무르며 말 뒤에 숨겨진 이미지를 떠올려보면 우리는 불을 볼 수 있고 그 열기도 느껴볼 수 있다. 우리는 모두 불꽃을 보고, 불의 열기를 피부로 느껴본 적이 있기 때문에 불을 추상적 개념 이상으로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단어는 상상을 통해 감각 경험을 불러온다. 우리의 상상 속에서 불이 타오르는 것이다.
우리가 '레몬'이라고 말한 뒤 그것을 떠올리면 입에 침 고이고 혀는 신맛으로 인해 움츠러든다. '초콜릿'이라고 하면 대다수는 단맛을 떠올린다. 이렇게 언어는 상징적이다. 언어가 유의미해지려면 기억, 감각, 상상력이 필요하다. 은유와 상징이 가르침에서 사용될 때, 이런 식으로 영향을 주는 것이 가장 좋다. '어두운 곳에서의 불꽃', 또는 '거울의 비춤'이라는 단어만 생각하면 안 된다. 감각, 몸, 그리고 상상력을 동원하여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지를 넘어서야 한다. 그러나 이미지는 우리에게 옳은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다.
등불이 켜진 집으로 들아갔을 때, 우리는 등잔과 심지와 기름을 조사하지 않는다. 그저 방의 광도를 경험할 뿐이다. 은유적인 가르침도 이처럼 해야 한다. 추상과 논리로 작업하도록 훈련받은 마음은 은유를 붙잡고 분석하려 들며, 너무 많은 것을 물어본다. 우리는 램프를 누가 실내로 가지고 왔는지, 불꽃이 어떻게 켜져 있는지, 바람이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알고 싶어 한다. 또 거울은 어떤 종류의 거울인지,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거울에 무엇이 비치는지 알고 싶어 한다. 이렇게 하는 대신, 이미지 속에 자신을 그저 머물게 하라. 이렇게 하는 대신, 이미지 속에 자신을 그저 머물게 하라. 단어에 숨겨진 경험을 찾아보라. 어둠이 있고 램프가 켜진다. 우리 모두는 몸과 감각으로 이게 어떤 경험인지를 알고 있다. 환하고 걸림 없고, 즉각 인식되는 빛에 의해 어둠이 사라진다. 바람이 불고 불꽃이 꺼진다. 우리는 어둠에 의해 빛이 사라지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도 잘 알고 있다.
「티베트 꿈과 잠 명상」/ 1998 정신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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