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꿈의 본성
꿈과 현실
경험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 무지
▷ 행위와 결과: 업과 업의 흔적들
▷ 부정적인 업
▷ 긍정적인 업
▷ 감정의 해방
▷ 의식의 장애
▷ 업의 흔적과 꿈
▷ 돌고 도는 육도윤회의 삶
▷ 왜 '부정적인 감정'인가?
부정적인 업
만약 우리가 어떤 상황에 부정적인 감정으로 반응한다면, 마음속에 흔적이 남는다. 그리고 그 흔적은 마침내 무르익어 삶의 상황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화를 내고 우리도 그에게 화를 냈다면 우리는 우리 안에 분노가 일어날 가능성을 높이는 흔적을 남긴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흔적은 우리의 습관적 분노가 일어날 이차적 상황을 더 자주 맞닥뜨리게끔 한다. 만약 우리의 삶에 화낼 일이 많거나 화낼 일이 많이 생기는 누군가를 알고 있다면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화가 많은 사람은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을 계속해서 마주하지만 화가 적은 사람은 그렇지 않다. 이들의 외적 상황은 어쩌면 비슷할 수도 있으나 업의 경향성이 다르면 주관적 세계도 다르게 창조된다.
감정이 충동적으로 표현되면 강력한 결과와 반응이 생성된다. 분노는 싸움이나 파괴 같은 것들을 불러온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신체적, 감정적으로 해를 입을 수 있다. 이는 분노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두려움이 충동적으로 표출되는 것 역시 두려움을 느끼는 이에게 굉장한 스트레스를 줄 수 있고, 그를 다른 사람들과 멀어지게 만들 수도 있다. 미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이러한 부정적 흔적들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억압된 감정 역시 부정적인 흔적을 남긴다. 억압은 혐오의 표현이다. 이것은 우리 내면의 무언가를, 즉 우리 경험의 일부를 억누르고, 문 뒤에 숨긴 후 그 문을 잠가버리고, 어둠 속에서 지내도록 강제하고 적대시하는 것이다. 적절한 이차적 원인이 그것을 튀어나오게 하기 전까지 말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한 질투를 억압하면 그것은 결국 감정의 폭발로 표출된다. 아니면 질투심은 우리가 은밀히 질투하는 그 사람에 대한 냉혹한 판단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우리가 스스로 질투한다는 사실을 부인할지라도 말이다. 정신적 판단 역시도 행동이며, 부정적인 업의 씨앗을 만들어내는 혐오에 기반하는 것이다.
긍정적인 업
우리는 두 가지 부정적인 반응, 즉 업의 경향성에 따라 행동하거나 억압으로 인한 행동에 끌려다니는 대신, 잠시 멈추어 스스로와 소통함으로써 부정적 감정에 대한 해독제를 만들 수 있다. 만약 어떤 이가 우리에게 화를 내어 우리도 화가 올라온다면 자비심이 그 해독제가 된다. 자비심을 유도하는 것이 처음에는 억지스럽고 인위적인 느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를 자극하는 사람이 그 자신의 조건화로 인해 고초를 겪는 존재임을 깨닫는다면 그리고 더 나아가 그가 자신의 부정적인 업에 갇혀 있기 때문에 의식이 속박되는 고통을 겪고 있음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어느 정도 자비심을 느끼게 되며 우리의 부정적인 반응들도 놓아버리게 된다.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형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새로운 반응 역시 욕망에 기초한 것이다. 위의 경우에는 그것이 미덕이나 평화, 영적 성장에 대한 욕망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비의 씨앗을 심은 것이므로 긍정적인 업의 흔적이 만들어진다. 따라서 우리가 다음에 또 분노와 맞닥뜨릴 때, 편협한 자기방어적 분노의 방어보다는 편안하고 관대한 자비심으로 반응할 가능성이 더 커진다. 이런 식으로 미덕의 수행은 세상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점차 교정해 주며,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분노를 마주할 일이 점점 적어지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끔 한다. 이 수행을 꾸준히 하면 마침내 노력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자비심이 생길 것이다. 업의 이해를 활용하면 우리의 모든 경험, 즉 아주 사소한 것이나 순간적인 공상에 쓰이는 우리의 마음을 영적 수행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유지할 수 있다.
감정의 해방
부정적인 감정을 대하는 최고의 방법은 집착이나 혐오에서 자유로운 비이원적인 인식에 머무름으로써 그것이 스스로 해방되게끔 허용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다면 감정은 마치 창공을 날아가는 새처럼 우리를 통과해 지나갈 것이다. 지나간 곳에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서 말이다. 감정이 일어났다가 자연스럽게 공(emptiness)으로 용해된 것이다.
이 경우에는 감정이나, 생각, 신체적 감각이나 특정한 행동에 대한 충동으로 업의 씨앗이 표출되었으나 집착이나 혐오로 반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래의 업의 씨앗은 생기지 않는다. 예를 들어 시기심을 경험할 때 우리가 그 감정에 휩쓸리거나 그것을 억누르려 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시기심이 생겨나도록 그것이 인식 속으로 용해되도록 허용하면 업의 경향성은 시기심이 약화되는 쪽으로 작용한다. 여기에는 시기심을 강화하는 어떠한 새로운 행동도 없다. 이런 식으로 감정을 해방하는 것은 업을 뿌리 뽑는 것과 같다. 업의 씨앗이 자라서 우리 삶에 문제를 일으키기 전에 그것들을 불태우는 것이다.
당신은 어째서 긍정적인 업을 만드는 것보다 감정을 해방하는 것이 더 낫냐고 물어볼 수 있다. 그 답은 모든 업의 흔적은 우리를 제약하며 특정한 정체성에 한정되게끔 작용하기 때문이다. 수행의 목표는 모든 조건화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번 해방된 사람에게는 자비 같은 긍정적인 특성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그것들은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가 더 이상 업의 경향성에 휩쓸리지 않게 될 때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밀고 당겨지기보다는 우리의 상황을 보다 명확하게 볼 수 있으며 더 자연스럽고 적절하게 반응할 수 있다. 물론 긍정적 업의 경향성에서 생겨난 상대적 자비심은 매우 좋은 것이지만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업의 조건하에서 해방된 개인에게서 어떠한 노력 없이도 완전하게 생겨난 절대적 자비심이다. 절대적 자비심은 더 넓고 포괄적이며 더 효과적이다. 또한 이원성의 환상에서도 자유롭다.
감정이 스스로 해방되도록 허용하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긴 하지만 우리의 수행이 발전되고 안정되기 전까지는 이것을 실천하기는 좀 어렵다. 그러나 이제 우리 모두는 감정이 생겨날 때 잠시 멈추어 우리 자신을 점검해 보고 가능한 한 더 명민하게 행동하기로 결정할 수 있다. 우리는 업에서 오는 습관적인 힘과 충동적인 힘을 완화하는 방법을 모두 배웠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는 감정이 그저 과거의 업의 흔적에서 생긴 결실임을 스스로 상기하는, 개념적인 과정을 활용해 볼 수 있다. 그러면 특정 감정이나 견해로 인한 정체성이 옅어질 것이고 우리의 방어성도 놓아버릴 수 있을 것이다. 감정의 매듭이 느슨해질수록 정체성도 옅어지고 포괄적으로 변한다. 우리는 더 긍정적인 반응을 선택하여 긍정적 업의 씨앗을 심을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중요한 것은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이 과정을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생각들을 떠올리려고 노력하는 동안에는, 분노를 몸에 꾹 억누르지 말고 긴장을 푼 상태로 자비심을 내야 한다.
영적 여정은 우리의 먼 미래나 다음 생에만 유익한 것이 아니다. 어떤 상황들 속에서 더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훈련을 하면 우리 업의 흔적을 바꿀 수 있게 되며, 우리가 이끌어가고 있는 바로 지금의 삶에도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자질을 계발할 수 있다. 아무리 작고 사소한 경험일지라도 모든 경험에는 결과가 따른다는 것을 보다 명료하게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의 삶과 꿈을 변화시킬 수 있다.
의식의 장애
업의 흔적은 집착이나 혐오를 나타났던 행동의 심리적 잔재로 우리와 함께 남아 있다. 이것들은 개인의 기본 의식, 즉 쿤지 남셰에 저장된 어두워진 의식이다. 쿤지 남셰를 어두워진 의식을 저장하는 보관소라고 말하긴 했지만, 실제로는 어두워진 의식 그 자체와 거의 동일하다고 보면 된다. 어두워진 의식이 없으면 쿤지 남셰도 없기 때문이다.
쿤지 남셰는 어떤 사물이나 장소가 아니며 이원적인 경험의 바탕이자 원인이다. 이것은 세월이 가며 쌓이는 습관처럼 실체가 없으며 강력하다. 습관은 우리로 하여금 언어를 써서 대화하게 하고, 형상을 실체로 대하게 하고, 존재를 무언가 이해와 풀이가 가능한 대상으로 보게 한다.
쿤지 남셰는 흔히 파괴될 수 없는 창고 혹은 저장소로 비유된다. 쿤지 남셰는 행동이나 사고 패턴들을 무더기로 저장한다. 이것은 경험의 근본원리가 되는데, 경험의 근본 원리는 외적 또는 내적으로 , 신체적으로 또는 인지적으로 우리가 선택한 각각의 크고 작은 행동에 영향을 받는다. 습관적 경향성이 개인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한, 쿤지 남셰도 존재한다. 사망 후에 육체는 사라지지만 쿤지 남셰는 사라지지 않는다. 업의 흔적은 정화될 때까지 정신 의식 안에서 지속된다. 업의 흔적이 완전히 정화되면 더 이상 쿤지 남셰는 존재하지 않고 개인은 부처가 된다.
업의 흔적과 꿈
모든 윤회의 경험은 업의 흔적에 의해서 형성된다. 기분, 생각, 감정, 정신적 이미지, 지각, 본능적 반응, '상식', 심지어 우리의 정체감조차도 모두 업의 작용에 의해 지배된다. 예를 들어 당신이 어느 날 아침에 우울한 기분으로 잠에서 깼다고 가정해 보자. 평상시처럼 아침 식사를 하고, 모든 것이 괜찮아 보이는데도 설명할 수 없는 우울감을 느낀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특정한 업이 무르익는 중이라고 한다. 우울감이 표출되는 어떠한 방식으로 원인과 조건이 만난 것이다. 이 우울감이 이 특정한 아침에 발생해야 하는 이유는 수백 가지가 있을 수 있으며 드러나는 방식 또한 무수히 많을 것이다. 이것은 밤 사이의 꿈으로도 드러날 수 있다.
우리는 감정이나 찰나의 정신적 이미지를 이성적인 마음으로 종종 합리화해버린다. 그러나 꿈에서의 의식이 이성적인 마음에서 해방되고, 이 의식 안에서 업의 흔적들이 표출된다. 이러한 작용을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낮 동안 의식은 감각들을 조명하고 우리는 세계를 경험하는데 이러한 감각과 심리적 경험들이 엮이면 삶에 의미가 부여된다. 그리고 밤에는 우리의 의식이 감각에서 물러나 근본 바탕에 머문다. 만약 우리가 공하고 환한 마음의 본성에 대한 많은 경험과 함께 존재의 수행을 견고히 계발해왔다면 이를 순수하고 명쾌한 인식 속에서 자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의 의식은 어두워진 의식과 업의 흔적들을 조명하고 이것들이 꿈으로 표출된다.
업의 흔적은 각각의 경험이 사진으로 찍히는 것과 같다. 기억, 감정, 감각 인식 또는 생각과 같은 모든 경험 중 집착이나 혐오에서 비롯된 반응은 사진으로 찍힌다. 그리고 잠이라는 암실에서 이 사진들이 현상된다. 이 이미지들이 어느 날에 현상될지는 최근에 겪었던 이차적 조건들에 따라 결정된다. 어떤 이미지나 흔적은 피상적인 경험으로써 희마한 잔류물만을 남기는 반면, 어떤 것은 강력한 반응을 일으키며 깊이 각인되기도 한다. 우리의 의식은 마치 프로젝터의 빛과 같아서 강한 자극을 받은 흔적들을 비추고 그 흔적들은 꿈의 이미지와 경험으로 표출된다. 우리는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그것들을 엮어내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이 의미를 만들기 위해 작용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조건화된 경향성과 습관적인 정체성으로부터 구성된 이야기에서 나온 결과물, 즉 꿈이다.
이 같은 과정은 우리가 깨어 있는 동안에도 계속되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우리의 경험'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구성한다. 이러한 역학은 꿈속에서 더 쉽게 이해될 수 있는데 물리적 세계와 이성적 의식의 한계에서 풀려나야 이러한 역학이 관찰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깨어 있는 동안에도 여전히 꿈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똑같은 과정을 겪고 있다. 우리는 마음의 내적 활동을 세상에 투사하고 우리의 경험이 '진짜'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우리 자신의 마음과 무관한 것으로 여긴다.
꿈 요가에서는 이러한 업의 이해를 영적 수행에 더 도움이 되는 꿈을 만들어내는 데 사용한다. 그러면 어떤 경험에 대해 달리 반응하도록 마음을 훈련시킬 수 있고 업의 흔적도 새로이 만들어진다. 이는 무의식 위에 군림하여 그것을 억압하는 의식, 아니면 어떤 강제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꿈 요가는 인식과 통찰력이 향상되면 삶에서 긍정적인 선택을 내릴 수 있다고 믿는다. 경험의 역동적인 구조를 이해하고 행위의 결과를 이해하면 모든 종류의 경험이 영적 수행의 기회가 된다는 인식이 생긴다.
꿈 수행은 또한 꿈속에서 미래와 관련된 업의 씨앗을 제거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우리가 꿈을 꾸는 동안 의식(awareness)에 머무를 수 있다면 업의 흔적이 드러났을 때 그것이 스스로 해방되게끔 허용하여 더 이상 업의 흔적이 우리 삶에서 부정적으로 표출되지 않게끔 할 수 있다. 이는 깨어있는 삶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마음의 환한 빛인 릭빠의 비이원적 인식에 머물 수 있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이것이 가능하지 않다면 우리는 우리의 기호나 이원성을 모두 넘어설 수 있을 때까지 꿈속에서도 영적으로 긍정적인 행동을 선택하는 경향성을 계발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어두운 것들을 정화하면 더 이상 현상될 사진도 없고 우리 의식의 빛의 형색에 영향을 주는 숨겨진 업도 없게 된다. 업의 흔적은 꿈의 근원이므로 업의 흔적이 완전히 고갈되면 오로지 의식의 순수한 빛만 남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화도, 이야기도, 꿈꾸는 사람도, 꿈도 모두 사라지고 빛나는 근원적 본성만이 절대적 실체가 된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이 꿈의 끝이자 '깨어남(awakening)'으로 알려진 이유다.
「티베트 꿈과 잠 명상」/ 1998 정신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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