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꿈의 본성
꿈과 현실
경험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 무지
▷ 행위와 결과: 업과 업의 흔적들
▷ 부정적인 업
▷ 긍정적인 업
▷ 감정의 해방
▷ 의식의 장애
▷ 업의 흔적과 꿈
▷ 돌고 도는 육도윤회의 삶
▷ 왜 '부정적인 감정'인가?
꿈과 현실
꿈을 기억하든 그렇지 못하든 우리 모두는 꿈을 꾸며, 아기 때부터 죽을 때까지 계속 꿈을 꾼다. 우리는 매일 밤 미지의 세계로 들어간다. 꿈에서의 우리 자신은 일상적인 자신으로 보일 수도, 혹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다. 꿈에서 우리는 알고 있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 살아있는 사람이나 이미 죽은 사람들을 만난다. 인간이 아닌 존재와의 조우나 웃음, 울음, 두려움, 환희, 변신, 비행, 지복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대개 이와 같은 비범한 경험들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꿈에 관심을 보이는 서양인 대다수는 심리학 이론에 근거한 꿈 분석에 집중한다. 그리고 좀 더 나아가 그들이 영적인 관점에서 꿈을 공부하게 되면, 대개 꿈의 내용과 의미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한다. 말하자면 꿈의 본질 자체를 연구하는 경우가 흔치 않다. 꿈의 본질을 연구하게 되면 그것은 환영 같은 우리 삶뿐 아니라 우리 존재의 존체 기저를 이루는 신비로운 과정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꿈을 수행으로 전환하는 첫 단계는 매우 간단하다. 바로 꿈이 우리를 영적 여정을 인도하는 위대한 잠재력이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꿈은 깨어있을 때의 삶인 '현실'과는 달리 '비현실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꿈보다 더 현실적인 것은 없다. 이 말은 평범한 우리의 삶이 꿈만큼이나 비현실적이며 그 둘은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생겨난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야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밤의 꿈뿐만 아니라 깨어서 꾸는 꿈에도 꿈 요가를 적용할 수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경험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무지
꿈을 포함한 모든 경험은 무지에서 생겨난다. 아마도 이 말은 서양인들을 무척 놀라게 할 것이다. 그래서 먼저 무지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티베트 전통에서는 무지를 두 가지로 구분한다. 선천적인 무지와 문화적인 무지가 바로 그것이다. 먼저 선천적인 무지는 윤회의 이유이며 일반적인 사람들의 특징이다. 선천적인 무지는 인간과 세상의 진정한 본질에 대한 무지이며 우리를 이원론적 마음의 망상과 얽히게 만든다.
이원론은 통일된 하나의 경험을 이것과 저것, 옳은 것과 잘못된 것, 당신과 나로 분리하여 양극화와 이분법의 논리를 강화한다. 이러한 개념적 분별을 바탕으로 우리는 욕망이나 혐오 같은 선호도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 선호도에 따른 습관적 반응이 우리의 자기규정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이것은 원하지만 저것은 원하지 않으며, 이것은 믿지만 저것은 믿지 못한다. 이것은 존중하지만 저것은 업신여긴다. 우리는 기쁨, 안락함, 부, 명성을 원하지만 고통, 가난, 수치심, 불편함에서는 벗어나려 한다. 우리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좋은 것을 바라지만 모르는 사람들은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 우리는 색다른 경험을 원하거나 반대로 자신의 경험에 집착하여 피할 수 없는 변화조차도 피하려고 한다.
두 번째 종류의 무지는 문화적으로 조건화된 무지이다. 이는 욕망과 혐오가 문화 안에서 제도화되고 가치 체계로 자리 잡으면서 생긴다. 예를 들어 인도에서는 힌두교도가 소고기를 먹는 것은 잘못이지만 돼지고기를 먹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티베트인은 둘 다 먹는다. 과연 누가 옳을까? 힌두교도는 힌두교도가, 이슬람교도는 이슬람교도가 옳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티베트인은 티베트인이 옳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서로 충돌하는 각기 다른 신념은 근본적인 지혜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라 편견 및 문화적인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 다른 예는 철학에서의 내부 분쟁이다. 다양한 철학적 체계는 미세한 점에서 서로 의견이 달라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 체계 자체가 존재를 지혜로 인도하려는 의도로 개발되었다 할지라도 추종자들이 현실을 이원론적으로 이해하고 그것에 집착하므로 체계 내에서 무지가 만들어진다. 이것은 어떠한 개념적 체계 안에서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개념적 마음은 그 자체로 무지의 징표이기 때문이다.
문화적 무지는 전통을 통해 강화되고 보존된다. 그 결과 문화적 무지는 모든 관습, 의견, 가치 체계, 지식 체계 안에 만연하다. 개인과 문화는 모두 이러한 기본 설정을 당연하게 여기며 이것을 상식이나 신성한 법처럼 받아들인다. 우리는 다양한 신념, 정당, 의료 시스템, 종교, 무엇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견과 우리 자신을 거치며 졸업장을 받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이 졸업장들은 집단적 무지를 더 정교하게 발전시킨 대가로 받는 상일지도 모른다. 교육은 특정한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는 습관을 강화한다. 우리는 잘못된 견해의 전문가가 될 수 있고 이 잘못된 이해를 더 정교하게 만들며 다른 전문가들과 교류를 시도할 수도 있다. 이것은 철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지적 체계를 상세하게 배우고 그 연구의 예리한 도구로 쓰일 수 있도록 자신의 마음을 계발한다. 그러나 선천적 무지가 깊게 박혀 있는 한 그는 근원적 지혜가 아닌, 편견을 습득하는 것에 힘쓰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특정 브랜드의 비누나 특정한 머리 모양 같은 매우 사소한 것, 그리고 좀 더 확대하자만 종교, 정치 시스템, 철학, 심리학, 과학 등에도 집착한다. 그러나 소고기나 돼지고기를 먹는 것이 잘 못되었다거나 이 철학 체계는 옳고 저 철학 체계는 그르다거나, 이 종교는 사실이며 저 종교는 거짓이라는 믿음을 갖고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것들은 분명 학습된 것이다. 특정한 가치관에 대한 충성이 문화적 무지의 결과라면, 제한된 견해를 받아들이는 성향은 타고난 무지의 특질인 이원론에서 나오게 된다.
그런 것들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그런 것일 뿐이다. 집착하는 마음은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고 세상에 큰 도움이 되는 기술과 다양한 예술로 나타날 수도 있다. 우리의 의식이 깨어나지 않는 한, 우리는 이원론에 빠져 있을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티베트에는 '당나귀의 몸을 입고 있는 한, 뜯고 있는 풀의 맛을 즐기라'라는 속담이 있다. 다시 말해,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므로 그리고 이 삶 자체가 큰 의미와 가치가 있으므로 감사한 마음으로 이를 즐겨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어떤 가르침이라도 결국 우리의 무지를 견고히 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누군가는 높은 학위를 얻는 것이 나쁘다거나 어떤 고기를 먹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전혀 중요한 게 아니다. 또 누군가는 무지가 나쁘다거나 인생은 그저 어리석은 윤회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무지는 단순히 의식이 어두워진 상태일 뿐이다. 어떤 것에 집착하거나 혐오감을 느끼는 것은 똑같이 이원론의 낡은 게임이며 이는 무지의 영역에서만 펼쳐진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이 얼마나 만연해 있는지 볼 수 있다. 심지어 영적인 가르침들조차도 이원론을 적용한다. 예를 들어, 미덕에 대한 애착을 고무시킴으로써 악덕을 혐오하게 만든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역설적이게도 무지의 이원론은 무지를 극복하는 데 쓰인다. 우리의 이해는 얼마나 섬세해야만 하는 것일까! 또 길을 잃기는 어찌나 쉬운지! 이러한 이유로 또 다른 개념적 체계를 발전시키기 위한 방어적 노력보다는 직접적인 경험을 위한 수행이 필요하다. 더 높은 관점에서 사물을 보면 모두 평등하게 보인다. 비이원적 지혜의 관점에서 보면 특별히 중요한 것도, 중요하지 않은 것도 없다.
행위의 결과 : 업과 업의 흔적들
우리가 속한 문화권은 우리를 조건화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우리가 어디를 가든 우리를 조건화할 씨앗을 품고 다닌다.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것은 실제로 우리 마음속에 있다. 우리는 환경과 상황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상황을 바꿀 수 있다면 행복해질 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은 그저 우리 고통의 이차적 원인일 뿐이다. 고통의 근원적인 원인은 선천적인 무지와 그로 인한 자신이 아닌 다른 무엇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다.
우리는 도시의 스트레스를 피해 바다나 산으로 떠난다. 아니면 시골 생활의 고립과 고단함을 떠나 도시의 흥분을 느껴보기도 한다. 변화는 좋은 것일 수 있다. 이차적 원인이 바뀌면 그에 따른 만족감이 생기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다. 불만의 근원은 우리를 따라 새집으로 옮겨왔고 또다시 새로운 불만이 자라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다시 한번 희망과 두려움이 뒤섞인 혼란에 빠지고 만다.
어쩌면 우리는 더 많은 돈, 더 멋진 파트너, 더 좋은 몸이나 직업, 학력을 가진다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진실이 아님을 알고 있다. 부자라고 해서 고난에서 벗어날 수 없고 멋진 새 파트너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불만을 느끼게 될 것이며, 몸은 노화될 것이고 새로운 직업에 대한 흥미는 줄어들 것이다. 불행에 대한 해결책을 외부 세계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의 욕구는 일시적으로만 채워진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욕망의 바람에 의해 마음이 산란해져 불안과 불만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업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미래에 수확할 업의 씨앗을 계속 싶고 있다. 이러한 행동 방식은 우리를 영적인 여정에서 멀어지게 할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의 만족과 행복을 찾지 못하도록 막는다.
움직이는 마음의 집착과 혐오는 동일시되어 있는 한, 우리는 현재 가지고 있는 것과 원하는 것이 다름을 느끼므로 부정적인 감정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일상에서 행한 거의 모든 행동은 이러한 감정에서 나온 것이며 이 행동들은 업의 흔적을 남긴다.
업은 행동을 의미하며 업의 흔적은 행동의 결과다. 업의 흔적은 우리의 정신 의식에 남아 우리의 미래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업의 흔적을 서양의 '무의식적 경향'으로 생각해 본다면 이것은 부분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업의 흔적은 성향, 생각과 행동의 패턴, 무의식적 반응, 습관적인 개념화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상황에 대한 우리의 감정적 반응과 지적 이해뿐만 아니라 특유의 감정적 습관과 지적 경직도에도 영향을 미친다. 업의 흔적은 우리 경험의 모든 요소들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반응을 창조하고 조건화한다.
여기에 업의 흔적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한 예가 있는데, 미세하고 사소한 경험의 수준에서도 이런 작용은 동일하게 일어난다. 싸움이 그치지 않는 집에서 자란 한 남자가 있다. 그가 성장하여 독립한 지 3~40년쯤 되었을 때 그는 길을 걷다 언쟁하고 있는 사람들의 집을 지나친다. 그날 밤 그는 아내와 싸우는 꿈을 꾼다. 그는 꿈에서 깨고 나서 분개했으며 현실의 아내에게 꽁한 기분을 느낀다. 아내는 그의 그런 기분을 알아채고 반응함으로써 그를 더욱 자극한다.
이러한 일련의 경험들은 업의 흔적에 대한 좋은 예다. 남자가 어렸을 때 그는 집에서 일어나는 싸움에 대해 두려움과 분노로 반응했고 상처를 입었다. 그는 불화에 대한 혐오감을 느꼈고 이 혐오감은 그의 마음속에 흔적을 남겼다. 수십 년 후 그는 어떤 집을 지나다가 싸우는 소리를 듣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오래된 업의 흔적이 재현된, 이차적 조건이다. 그리고 이 오래된 업의 흔적은 그날 밤 꿈으로 나타난다.
꿈에서 남자는 분노와 상처의 느낌으로 아내의 도발에 반응한다. 이 반응은 그가 아이였을 당시 의식에 쌓였던 업의 흔적에 의해 지배된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 업의 흔적은 지금까지 여러 번 강화되어 왔을 수도 있다. 꿈속 아내, 즉 남자의 마음이 완전히 투사된 인물이 그를 자극할 때 그는 어렸을 적과 마찬가지로 혐오 반응을 보인다. 그가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이전 카르마의 열매인 부정적인 감정 휩싸인다. 그는 현실의 아내에게 꽁한 기분을 느끼고 그녀와 소원해진 기분이 든다. 이 복잡한 상황은 더 나아가, 아내는 다혈질적인 반응이나 꽁한 반응, 아니면 사과하거나 굽신거리는 반응을 보이며 자신의 업에 의해 결정된 습관적 경향대로 반응한다. 그리고 남자는 다시 부정적으로 반응함으로써 또 다른 업의 씨앗을 뿌린다.
외적이든 내적이든, 깨어있을 때든 꿈에서든 어떠한 상황에 대한 반응은 집착과 혐오에 기반하는 것이며 이는 마음에 흔적을 남긴다. 업이 명령한 반응은 더 많은 업의 씨앗을 뿌린다. 그리고 이 씨앗은 다시 반응을 명령한다. 그렇게 계속 이어진다. 이것은 업이 또 다른 업으로 우리를 이끄는 방법이자 윤회의 바퀴이며 행동과 그것에 대한 반응의 끊임없는 사이클이다.
이 예는 업의 심리적 차원에 초점을 두고 있지만, 사실 업은 존재의 모든 차원을 결정짓는다. 업은 개체적 삶에서의 감정적, 정신적 현상을 형성할 뿐 아니라 존재의 지각과 해석, 몸의 기능, 외부 세게의 원인과 결과까지도 형성한다 이렇게 크고 작은 경험의 모든 측면은 업의 지배를 받는다.
마음속에 남겨진 업의 흔적은 씨앗과 같아서 이것이 나타나려면 특정한 환경이 요구된다. 씨앗이 싹을 틔워 자라나려면 수분, 빛, 영양소, 온도의 올바른 조합이 필요한 것처럼, 업의 흔적도 적절한 상황이 갖춰졌을 때 드러난다. 앞서 말했듯이, 업이 드러나게끔 자극하는 상황적 요소들이 바로 이차적 원인과 환경이다.
업을 원인과 결과의 과정으로 생각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이런 생각은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어떤 상황에서의 반응으로 일어난 선택이 반드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인식하게끔 도와주기 때문이다.
업의 흔적이 그보다 더 큰 업의 지배를 받는 행동의 씨앗이 된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면 이를 활용해 삶의 부정성을 창조하는 것을 피하고 우리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상황들을 창조할 수 있다. 아니면 우리는 감정이 생겨날 때와 마찬가지로 감정이 스스로 해방되도록 허용할 수 있다. 그 방법만 안다면 말이다. 이런 경우에는 새로운 카르마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티베트 꿈과 잠 명상」/ 1998 정신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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