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는 명일이라 일양(一陽)이 생生 하도다.
시식詩食으로 팥죽을 쑤어 이웃과 즐기리라.
새 책력冊曆 반포頒布하니 절후 어떠한고.
해 짧아 덧이 없고 밤 길어 지리하다.
농가월령가의 한 소절입니다.
이 가사로 보아도 우리 조상들이 동지를 명일로 여겼고 팥죽을 쑤어 나눠먹는 풍속이 전해짐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불교와 직관되는 명절은 아니었지만 우리 불교가 민중불교로서의 역할과 어우러져 자연스럽게 절에서도 명절로 자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동지는 '다음 해가 되는 날'이란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설날에 버금가는 날'이라는 뜻으로 아세亞歲라고 합니다.
고대에는 우리 민족도 태양 숭배를 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옛사람들은 동지로부터 태양이 다시 길어지는 현상을 태양이 죽음으로부터 소생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축제를 벌이고 이날을 새해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즉, 동양학적으로 이날은 일양一陽이 비로소 생하는 날이라고 합니다. 동짓날에 비로소 양陽의 기운이 생하여 만물을 생장시킨다는 생활철학적 의미입니다.
연말이나 정초가 되면 스님에게 법문 청하러 오는 신도는 거의 없고 대부분 사주 봐달라거나 신수부적 써달라거나 하는 분들이 많이 찾아옵니다. 이는 역학적 사고가 뿌리 깊은 우리 민족 특성 중 하나인데 역(주역)학 자체는 아주 깊은 철학적 내용을 품고 있지만 역학자의 능력과 소양에 따라 악용되는 수가 많으니 우리 불자들은 직업적인 역술가들에 어리석게 접근하시는 일이 없도록 사려해야 합니다.
팥으로 죽을 쒀서 나눠먹고 축사하는 행위는, 역학 오행에서 붉은색이 강렬한 태양의 파워를 뜻하며 희망 활동적인 것, 남성상, 적극적 행위 등을 의미하는 동시에 새싹 같은 희망을 내재하기 때문입니다.
해뜨기 전에 가장 춥고 봄이 오는 입춘 추위가 가장 매섭듯이 동짓날은 밤이 가장 길어 음양오행 법으로 말하면 귀신들이 가장 왕성하게 득세하는 날이기에 귀신을 억제하는 방도로 귀신이 가장 싫어하는 빨간색을 이용하여 이를 물리치려는 지혜 방편으로 팥으로 죽을 쑤어 온 집안에 구석구석 뿌리는 풍속이 생겼다 합니다.
귀신이란 불교 용어로는 마魔에 해당합니다. 부처님을 해코지했던 마왕 파순을 비롯해서 우리의 공부를 방해하고 선한 일을 방해하고 사람의 내면 의식을 황폐화시키는 악성 귀신을 마구니 마장 마라고 합니다. 공부가 익어가면 마의 방해가 심해지기에 도고마성道高魔盛 이란 말이 있습니다.
모처럼 동짓날에 초하루에 마하연 부처님 뵈러 맘을 내었지만 뜻하지 않는 일이 생기거나 열심히 기도하는데도 반대급부가 돌아오는 것도 역시 마가 방해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마는 대부분이 자기 자신의 내부 내면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마장이란 우리의 마음의 허점만 노리는 저격수입니다. 기도자가 성급히 성취를 바라거나 엉뚱한 욕심으로 소원을 빌거나 하면 지체 없이 달려드는 게 마입니다.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쳐들어온다 했습니다. 마음에 틈이 없으면 마가 오지 못합니다. 휘황 찬란한 네온사인과 산해진미와 경국지색의 미녀들이 유혹하는 밤거리라도, 그런 곳에 관심 내려놓은 자들에겐 아무 걸림이 없듯이 마음에 틈이 없으면 마는 다른 나라 이야깁니다.
우리는 한동안 전통을 무시하고 서양 풍속을 절대적 신앙으로 흡수하였던 때도 있었습니다.
우리 먹거리인 김치나 된장 등이 요구르트나 치즈보다 빠지지 않는 발효식품인데도 서양 식품이 좋다고 무조건 배척하던 시절도 있었으나, 지금은 서구 문명의 질곡과 명암에도 눈을 뜨고 우리 조상들의 유산과 문화가 얼마나 과학적이고 지혜로운 삶의 처방인지 알게 되었으니 참으로 다행인 시점입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동지와 크리스마스가 늘 비슷한 시기에 있곤 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의 탄생일과 사실적으로 연결되어 있기보다는 종교일이라는 한 트랜드적 형태로 연결되어 많은 세계인들이 문화적 축제일로 즐겁게 보내는 명일이다.
크리스마스 축제는 4세기 경부터 로마에서 시작되어 그리스도 탄생의 축제일로 설정되었는데 이 시기에 날짜가 선택된 이유는 이날이 정복되지 않는 태양신의 축제일이기 때문이었다니 동서양의 선조들의 태양 숭배 사상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이다.
태양은 동지가 지나면서부터 다시 더 밝은 빛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고대인들은 이 시점을 태양의 시작으로 보고 그날을 태양신의 탄생일로 지켰는데 이날이 12월 25일이요, 우리의 동짓날과 하나의 태양을 품고 있는 것이다.
서양의 크리스마스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게 십중팔구는 산타 할배 아닌가 싶다. 우리 불교의 핵심인 육바라밀의 최정수인 보시행 그것도 칠지 보살급 이상이나 가능하다는 무주상 보시의 화신이자 대명사인 산타 보살이 서양에 계시다는 게 너무 안타깝고 부러운 마음이 드는 걸 왜일까.
세계의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하는 소나무(사실은 한국 원산지인 구상나무)도 로열티 하나 없이 서구에 빼앗긴 것을 아는 분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둥글다 못해 뚱뚱한 몸집에 항상 미소를 지으시며 배는 풍선처럼 늘어져 괴상한 모습이지만 우주에서 가장 포근함으로 만중생을 해탈문으로 인도하고 계시는 포대 화상을 우리 불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눈인사를 드렸을 테고 둥글 두툼한 배를 쓰다듬으며 소원 빌면 득자한다고 배도 한 번쯤은 다 쓰다듬어 보셨을 그분 포대布垈 화상을 떠올려 본다.
포대화상은 중국 후양인으로 주원장을 도와 명나라를 세운 일등 공신으로 황제가 된 주원장이 자신의 출신성분에 부끄러움을 느껴 자신을 도와 명을 건국했던 일체의 승려들과 자신의 태생을 아는 일체 지인들을 다 죽여버리는 후안무치함을 저지르는데 포대 화상 역시 그때 동고동락했던 도반 주원장에게 죽임을 당하면서도 원망 없이 회한 없이 몸을 버렸다고 한다.
생전의 포대화상은 뚱뚱한 얼굴에 항시 웃는 모습이었으며 배는 풍선배이고 늘어져 괴상한 모습으로 지팡이 끝에다 커다란 자루(포대, 푸대)를 둘러메고 다녀 시기에 사람들은 그를 포대화상이라 불렀다. 동안에 화안이고 보기만 해도 편안해지는 얼굴인지라 그의 곁에는 늘 아이들이 따라다녔다 한다.
포대화상은 무엇이든 주는 대로 받아먹고 땅을 이불 삼아 구름을 배게 삼아 어느 곳이든 벌렁 누워 태평하게 코를 골며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면서 세속 사람들과 차별 없이 어울리며 길을 가르치고 이끄는 대행보살이셨으며 자연과 더불어 자고 일어났으며 자연과 함께 행하였으며 대자연으로 돌아간 걸림 없는 대자유인이었다.
언제나 항상 큰 지팡이에 큰 포대를 지니고 다녔는데 그 자루 포대엔 언제나 아이들에게 줄 사탕, 장난감, 엿, 옷가지 등을 가득히 담아가지고 마을을 돌면서 아이들에게 무엇이든 기쁘게 나누어 주었다.
그는 가끔 발우를 든 모습으로 탁발승의 성격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런 모습은 탁발을 하면서 세상의 슬픔을 수렴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즉, 그의 삶이 보여준 진실은 만중생의 세속적 번뇌와 고통을 받아서 자루에 담고 대신 포대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대지혜인 웃음과 기쁨 희망을 나눠준 것이다. 자신의 모든 삶의 지혜와 방편을 모든 중생들에게 희망과 구원의 메시지로 회향한 것이다.
요즘 온 나라가 크리스마스를 찬양하고 트리탑이 켜지고 휘황찬란한 법석을 떨고 천진 동자들의 순순한 눈망울이 잠식되어 가는 모습이 조금은 안타깝다. 시대적 배경은 조금 다르지만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포대화상 같은 분으로 작품을 만들어 계승한다면 산타 할배 몇십 배 의미심장한 기념비적 세계적인 정신문화를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았을까?
지금이라도 헌 계절 옷 벗겨내고 세수시키고 단장해서 전 세계인을 아우를 수 있는 트렌드로 창출 아니 창조도 얼마든지 가능할 텐데 하는 아쉬움이 가득한 시점이다.
어렵지만 일단 나아가는 게 중요하다. 나아갈 수 없으면 길이 아니다. 길은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그러나 길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자리가 없어요.. 나에겐 안목이 없어요.
수없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기회를 주었건만 우리 것을 천하다 박하다 남의 주머니만 쳐다보았기에 내 집 앞으로 예정된 신작로가 허리 한 바퀴 돌아 남의 동네로 휘둘려진 것 그것이 우리의 마장이 아니었을까?
우리의 이번 동지 법회와 을미년 백일기도로 다 같이 마음 단속 잘하기를 권합니다. 지나친 욕심은 마음의 번뇌를 이끌어 빈틈이 들고 마가 침노합니다.
자녀 입시 기도를 하건, 자녀 성혼 기도를 하건 지나친 사욕엔, 다 채우지 못한 욕망의 틈 사이로 마가 불쑥 고개를 디밀고 “내가 그 욕망을 채워 주마” 하고 유혹을 하게 됩니다. 대부분 이 유혹은 꿈으로 오기도 하고 상상으로 오기도 하고 현실에서도 조금 맛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불법의 결론은 “철저한 인과응보 법칙이며 참회의 결과"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마와 장으로부터 나와 내 가족 그리고 사회를 지키려면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욕심 없는 불자에게는 마귀나 귀신은 위력 발휘를 전혀 못합니다. 내 능력만큼 빌고 내 깜냥만큼 기도하는 것은 욕심이 아닙니다.
나를 알고 내 가족의 현실을 알고 조금씩 기도하며 의식 확장해 가며 내면을 성숙시켜 한 발짝씩 다음 기도로 정진해 나가는 것이 욕심이 아닌 지혜이고 나와 내 가족이 더 잘 살게 되는 길입니다.
기도에는 절대로 지름길이 없습니다. 구름 뒤에는 늘 태양이 있고 터널 뒤에는 반드시 출구가 있습니다.
그러나 욕심으로 금 은 보석 가득한 동굴로 향한다면 동굴은 반드시 막혀서 되돌아와야만 하는데...
2014년 12월 18일
마하반야바라밀 승묵 합장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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